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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찍은 48%를…' 朴이 찾는 국무총리감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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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조직 개편안이 발표되면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조각(組閣·내각을 짜는 일)이 탄력을 받게 됐다. 인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국무총리다. 박 당선인이 1998년 정계 입문 이후 한 많은 인선 가운데 가장 비중 있는 자리다. 그만큼 박 당선인도 신중하게 사람을 고르고 있다는 게 인수위원회 주변의 얘기다. 인수위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총리 발탁의 코드는 다음의 세 가지다.

 ①"너무 보수 성향 강하면 어려워”=일단 박 당선인은 대선 때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48%의 유권자를 포용할 수 있는 중도 성향의 인사를 총리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한 측근은 16일 “이명박 대통령은 540만 표차 압승을 너무 믿고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이다 화를 자초했지만 박 당선인은 문재인 전 후보를 찍은 48%의 마음을 ‘힐링’해야만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며 “48%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느냐가 총리 인선의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너무 보수 성향이 강한 인사는 발탁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②경제통보다 관리형=새 정부에서 경제부총리직을 부활해 경제사령탑을 맡기기로 했기 때문에 총리는 경제통보다는 관리형 인사가 기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수위 관계자는 “박 당선인이 고심 끝에 경제부총리를 만들기로 한 것은 총리와 경제부총리의 역할 분담에 대한 구상이 세워진 것으로 봐야 한다”며 “경제는 경제부총리가 책임지고 총리엔 민심을 폭넓게 아우르는 명망가 타입이 발탁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경제통 총리 후보로 거론되던 진념 전 경제부총리,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등의 기용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평가다.

 ③대통령과 호흡 맞출 세종시 총리=박 당선인의 국정 철학이나 정치 스타일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느냐도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세종시 출범으로 새 정부에선 대통령과 총리가 물리적으로 완전히 떨어져 근무하는 초유의 실험이 시작된다”며 “대통령과 총리가 자주 만나지 않고도 박자를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박 당선인이 조선시대 명재상이었던 오리(梧里) 이원익과 같은 총리감을 찾는다는 말도 나온다. 이원익은 40년간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낙향한 뒤엔 비 새는 초가집에서 노년을 보낸 청백리다. 광해군, 그리고 광해군을 축출하고 들어선 인조가 모두 첫 재상으로 그를 기용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원익은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실무적으로 일처리가 매끄럽고 워낙 청렴했다”며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도 그런 인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인수위 주변에선 법조계 출신이 총리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박 당선인은 고비 때마다 법조계 출신들을 중용하곤 했다. 헌법재판소장 출신인 김용준 인수위원장이나 지난해 총선 때 정홍원 공천위원장 등이 그런 경우다.

 최근 급부상한 인사가 조무제 전 대법관이다. 조 전 대법관은 1993년 공직자 첫 재산공개 당시 6400만원을 신고해 ‘딸깍발이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대법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모교인 동아대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총리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고사했다고 한다. 다만 고향이 영남(경남 진주)이란 점은 부담이 될 수 있다.

 헌법재판소장으로서 평가가 좋았던 이강국(전북 전주) 소장이나 김능환(충북 진천) 선관위원장도 곧 임기를 마치거나 사의를 표명한 상태여서 총리 후보 물망에 올라 있다. 목영준(서울) 전 헌재 재판관이나 김용준(서울) 인수위원장도 총리 후보로 거론된다. 비법조 쪽에서 발탁한다면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박상증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의 기용 가능성이 거론된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사진)=조선 중기의 명신. 1569년(선조 2년) 급제 후 임진왜란을 겪고 1599년(선조 32년) 영의정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영의정에 임명돼 대동법의 모체가 되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했다. 인목대비 폐출에 반대해 홍천으로 유배됐으나 1623년 인조반정 직후 76세의 나이로 다시 영의정에 제수됐다. 신념과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실무적 경륜을 갖춘 명재상이란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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