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박근혜계의 생존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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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논설위원

“멘붕이다.” 새누리당 박근혜계 인사의 토로였다. 박 당선인 측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근혜계의 기류라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대선 직후 고위당직을 맡고 있는 A의원에게 이력서가 답지했다. 그는 정작 누구에게 이력서를 전달해야 할지 몰랐다. 고민하던 차에 실세 B의원이 인수위 밑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B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한두 명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B의원이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형님, 누구 약 올리오?” 지역구에 칩거 중인데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투였다. A의원은 또 다른 실세 C의원에게 연락했다. C의원도 “나도 (당선인 측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은 게 없다”고 했다. 그 정도로 포기할 A의원이 아니었다. 원로 중 한 명에게도 말을 넣었다. 그러나 “글쎄, 나하고 예전엔 상의했는데 요즘 통 안 하네”란 답을 들었을 뿐이다. A의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일화를 전한 이의 심리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 달간 전화를 기다렸는데 이젠 떠나야겠다”고 했다.

 사실 박근혜계는 단일 그룹이 아니다. 과거 이명박계였다가 박근혜계로 전향한 ‘월박(越朴)’도, 김무성 전 의원이나 진영 의원처럼 한때 박근혜계를 떠났다가(탈박·脫朴), 돌아온 복박(復朴)도 있다. 상임위에서 박 당선인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발탁된 유일호·안종범·류성걸 의원은 ‘옆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임위에선 간사를 빼곤 가나다순으로 앉으니 성(姓), 즉 아버지를 잘 둔 덕에 박근혜계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이다.

 당선인 비서와 연결 속도로 구분되기도 한다. 비서가 바로 전화를 받으면 박근혜계 핵심이랄 수 있다. 당시엔 안 받더라도 당일 응답하는 경우가 차선, 다음 날에라도 연락이 있으면 차차선이다. 답신이 없는 경우가 최악이냐고? 그렇지 않다. 아예 비서에게 전화 걸 일이 없는 경우란다. 그쯤이면 ‘자칭 박근혜계’인 칭박(稱朴)일 테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친박 핵심이든 칭박이든 사정은 비슷하다. 다 잠수(潛水) 중이다. 목소리는커녕 숨소리도 잘 안 낸다. 2인자도 ‘촉새’도, “뚜렷한 신념 없이도 권력을 좇아 이쪽과 저쪽을 쉽게 오가고 서로에 대한 신의는 없고 얄팍한 계산만 하는” 이도 질색하는 당선인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아서다. 그나마 공개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여의도와 거리를 두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할 때다. 초연함 말이다.

 사실 정치인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자리’ 또는 위임(委任)이다. 과거처럼 대통령이 돈을, 공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닌 터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결국 정치인을 발탁했다. 임기 중반을 넘어가면 여당의 도움이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박근혜계가 “우리도 언젠가 쓰이겠지”라며 기다릴 수 있는 까닭이다. 늦더라도 임기 중반엔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믿는다.

 요즘 같으면 기다리는 게 딱히 고역도 아니다. 정책통 위주로 발탁되거나 장관 출신 3선 의원이 취임준비위 부위원장으로 직급을 낮춰가는 식이기 때문이다. 저간 사정이야 어떻든 “친박들은 다 물러나 있기로 했다. 그게 돕는 길이다”라고 해도 통한다.

 장차 한둘 기용되면 서운한 마음이 들겠지만 이 대통령과 이명박계의 ‘동업’ 수준까진 불가능하다는 걸 박근혜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거다. 박 당선인과 박근혜계는 그보단 일방향 관계였기 때문이다. 주로 박근혜계가 박 당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박근혜계이기에 공천받고 당선될 수 있었다. 정치력은 박 당선인이 발휘했고 박근혜계는 뒤에 서 있기만 해도 됐다.

 박근혜계에겐 기다림이 더 용이한 일일 수 있다.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박근혜 없는 여의도 정치’를 해야 할 순간이 곧 올 테니 말이다. ‘선거의 여왕’이 없는 선거도 치러야 한다. 정치인으로 자기 목소리도 내야 한다. 본 실력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러니 잠수 시대를 슬퍼하기보단 실력 도양의 기회로 여겨야 한다. “쓰라림을 체험하고 나서야 참된 정치적 달관을 얻게 된다”(『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고 하지 않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