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미혼모 판틴을 위한 해피 엔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번에 영화로 보기 전에는 ‘레미제라블’이 그토록 방대한 비극인 줄 미처 몰랐다. 어렸을 때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읽은 이야기는 일종의 교훈적 동화였다. 빵 한 덩어리를 훔쳤다가 19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이 은촛대를 선물로 준 신부님에 감화되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장발장이 왜 어린 소녀 코제트를 애지중지하며 키우게 됐는지, 코제트의 엄마 판틴이 왜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기억에 없는 채 영화를 보러 갔다. 크게 허를 찔렸다. 판틴은 이 뮤지컬 영화에서 가장 가슴 저린 사연의 장본인이다.

 판틴이 부르는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의 노랫말로 추정컨대, 판틴은 사랑에 버림받고 혼자 아기를 키우게 된 여자다. 어린 딸을 여관집에 맡기고 공장에서 일하며 양육비를 번다. 그런데 미혼녀가 아니라 미혼모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해고를 당한다. 직공들이 합창으로 들려주듯, 모아놓은 돈이라곤 일주일치 생활비가 전부다. 양육비를 벌 길이 막막해진 판틴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생니를 뽑아 팔고, 사창가로 들어간다. 판틴이 살았던 약 200년 전 프랑스 사회에는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제도 같은 건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는다. 인정 역시 메말랐다. 동료 직공들은 딱한 판틴을 편들기는커녕 심술궂게 해고를 종용한다. 인품 훌륭한 공장 사장님 장발장은 하필이면 판틴이 쫓겨나는 순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 코제트를 맡아 키워주던 여관집 부부는 알고 보니 아동학대를 일삼는 돈벌레들이다.

 사실 판틴 같은 미혼모를 향한 우리 사회의 시선도 그리 따사롭다고 말하긴 어렵다. 몇 해 전 취재차 만났던 미혼모들에게 들은 사연이 그랬다. 이들은 철부지 10대와 한참 거리가 멀었다.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에 여러 해 직장에서 일한 성인들이었다. 그런데도 아기를 직접 키우기로 결심한 직후 겪은 상황은 10대 미혼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사회 통념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 일자리를 잃은 경우도, 미혼모가 되는 대신 입양을 보내라는 가족들과 갈등 끝에 남남처럼 된 경우도 있었다. 양육과 생계를 나 홀로 책임져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좋은 엄마, 강한 엄마가 되려는 마음은 여느 엄마들과 매한가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만약에’를 떠올렸다. 만약에 사장 장발장이 나서 판틴의 해고를 막았다면, 판틴이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면, 아니 코제트의 생부가 육아를 공동으로 책임졌더라면…. 그랬다면 ‘레미제라블’은 지금만큼 감동적인 전개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판틴의 진짜 행복은 장발장의 손에 코제트가 아리따운 숙녀로 자라는 것보다는 엄마와 딸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이었을 테니까. 그게 영화나 문학이 아니라 현실에서 보고 싶은 해피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