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힘’얘기하던 유기농 아버지 원경선, 흙으로 돌아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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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기농 채소밭 흙고랑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원경선 원장. 10년 전 충북 괴산의 풀무원 농장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기력이 쇠해진 3년 전까지 손수 농사를 지었다. [중앙포토]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 ‘농군 나눔 공동체의 선구자’ 원경선 풀무원농장 원장이 8일 경기도 부천 순천향대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원 원장은 평생 농업에 헌신해 ‘100세 농군’으로도 불린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기농법을 시작한 선구자다. 유기농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땅의 힘과 거름만 사용하는 친환경 농법이다.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열여섯 살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면서 농군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전쟁 후 월남해서 경기도 부천에 정착, 1만 평의 땅을 개간해 풀무원농장을 만들었다. 이곳은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위한 공동체였다. 전쟁 직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나자 ‘모두 같이 잘 살자’는 일념으로 이 공동체를 만들었다. 농장의 문은 밤에도 열려 있었다. 제 손으로 일해서 굶주림을 이겨 내겠다는 사람은 누구든 함께 일하자는 취지였다.

 풀무원이라는 이름은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는 도구’를 가리키는 풀무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인은 “가난하고 일 없는 사람도 농사일로 풀무질을 하면 세상에 반드시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환갑을 넘긴 75년 그는 일본의 고다니 준이치가 쓴 『농부의 길』을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생명을 사랑하는 유기농이 바른 농사다’라는 구절은 그를 유기농의 길로 이끌었다. 원 원장은 이듬해 경기도 양주로 농장을 옮기고 국내 첫 유기농민단체인 ‘정농회’를 설립했다. ‘이웃사랑과 생명존중’을 모토로 삼았다. 하지만 농약을 안 쓰니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벌레도 극성을 부렸다. 비료 대신 자연 거름을 만들어 썼지만 수확량이 줄었다. 고인은 “땅을 살려내야 생명이 살고 지구가 살아난다”며 버텼다. 3년 뒤부터 땅에 힘이 붙고 수확량이 조금씩 늘면서 성과가 나타났다.

 원 원장은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열린 교육’으로 유명한 경남 거창고 이사장 시절(61~2006년) 군사정권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겐 ‘인간 상록수’란 별명이 붙었다. 생명존중의 유기농 운동은 이후 평화운동으로 발전했다. 89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에 초석을 마련했으며, 직접 아프리카 기아 현장에서 구호 활동을 했다. 이 기구의 창립 20주년 공로패를 수상하는 자리에서 그는 “전 세계 63억 명 중 10억 명이 굶고 2초에 한 명씩 기아로 죽어나간다”고 역설했다.

 원 원장의 장남인 민주통합당 원혜영(62) 의원은 “아버지는 바르게 살라는 말과, 가진 것을 남과 나눠야 한다는 말을 끝도 없이 하셨다”며 “자식들을 모아 놓고 전 세계 25%의 인구가 굶고 있으니 각자 수입 중 25%를 내놓겠다는 약정서를 쓰라고 하신 분”이라고 했다. 또 “어릴 때부터 남의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자는 공동체 생활에 익숙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저서 『아버지 참 좋았다』에서도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썼다.

 81년 원 의원이 창립한 식품회사 풀무원의 고문으로도 활동한 고인은 10년 전 충북 괴산의 풀무원농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3년 전 기력이 쇠해질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었다. 원 의원은 “40년 가까이 유기농 식단으로 식사하고, 이웃을 공경하는 마음, 강한 정신력을 유지하신 게 100세까지 사신 비결인 것 같다”고 했다. 고인은 녹색인상(92년)과 유엔 글로벌 500인상(95년), 국민훈장 동백장(97년) 등을 수상했다. 풀무원은 충북 괴산 풀무원 연수원 안에 원 원장 기념관을 설립해 그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유족은 원 의원과 차남 혜석(미술가), 딸 혜옥·혜진·혜주·혜덕·혜경, 사위 하중조(KT&C 엔지니어링 대표)·송영관(전 상명고 교사)·김창혁(회사원)·김준권(정농회 회장)·유진권(전 중앙일보 기자), 며느리 안정숙(전 영화진흥위원장)·류정희씨 등이 있다. 발인은 10일 오전 9시 삼성서울병원. 장지는 인천시 강화군 파라다이스 추모원. 3410-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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