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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직장내 성희롱 속앓이…이젠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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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소망화장품㈜ 서울사무소 직원 1백여명은 지난달 이색적인 '시험'을 치렀다. 직무평가와 인성평가였는데 직원들이 무기명으로 동료 직원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다면평가라는 방식 자체도 새로운 시도였지만 특이한 문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인성평가 항목 중 성희롱 관련 문제가 포함된 것이었다. 내용인즉 누가 잠재적 성희롱 위험 인물인지를 적어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긴장했지만 다행히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회사는 앞으로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본인에게 그 결과를 통보하고 인사평가에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기업마다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성(性)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에서도 공공연하게 성희롱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성적인 농담이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 직장생활의 활력소라는 생각도 사라졌다.

연말연시 등 직원들끼리의 모임이 많을 때 인사 담당 임원들은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혹시라도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염려해서다.백화점.보험.호텔.항공 등 여직원의 비율이 높은 회사들의 임원들이 더 긴장한다.

자동차.건설.중공업 등 상대적으로 남성이 많은 직장은 느긋한 편이다.

기업들은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됨에 따라 연 1회 이상 의무적으로 예방교육을 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3백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게다가 지난해 말 법원이 직장 성희롱 사건에 대해 가해자뿐만 아니라 회사도 책임이 있다고 판결해 기업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기업들은 예방교육 등을 정례화하고 문제가 있는 직원들을 단호하게 징계한다.

신라호텔은 사규와 취업규칙에 성희롱 금지를 명문화했다. 위반할 경우 감급.정직.감봉.파면 등의 징계를 내린다. 신규 직원은 성희롱 관련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하고 승진할 때마다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회사는 성희롱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차별 금지에까지 관심을 쏟고 있다. 3개 사업부서 인사팀의 대리급 여직원 1명씩을 '민원 담당'으로 지정해 여직원의 신고를 받는다.

장우종 과장은 "성희롱 문제를 남녀평등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교육하고 있다"며 "남녀평등 의식이 정착되면 성희롱도 자연 없어지기 때문에 업무처리 과정에 차별이 없도록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 내 상담창구를 마련한 회사도 늘고 있다. 유아용품 전문업체 ㈜아가방은 지난해 11월 서울 역삼동 사옥에서 성교육 전문가를 강사로 초청, 성희롱 예방에 관한 교육을 했다.

이 자리에서 회사 측은 성희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남녀 간부 한명씩을 상담원으로 지정했다. 문제 있는 직원들은 징계위원회에 넘겨 해결한다.

예방교육 내용도 점차 세련되고 있다.

SK㈜는 2000년 예방교육 책자를 배포한 뒤 2001년에는 사내 인트라넷에 동영상 강의를 띄워 직원들이 교육받도록 했다. 동영상 교육을 끝내면 P(패스)를 주고, 못마치면 F(패일)를 주는 등 교육이수 여부를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신세대 취향에 맞춰 동영상을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바꿔 직원들의 참여와 이해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르면 3월부터 애니메이션 방식의 흥미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기업체마다 교육에 힘쓰면서 강사들도 덩달아 바빠지고 있다. 여성부가 운영하는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 은행에는 2백66명의 강사가 등록해 기업체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2001년의 경우 한 명의 강사가 평균 10회씩 교육을 했다.

기업들은 성희롱 문제가 발생하면 머뭇거리지 않는다. A대기업은 1년 전 부서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과 입맞춤한 30대 과장을 퇴사시켰다. 20대 여직원이 취중에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과장에게 애정을 표시한 돌출사건이었으나 회사는 문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해 강경책을 썼다. B기업도 최근 2년 새 간부 직원 두 명을 해고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적극적인 것은 자칫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 당사자는 물론이고 기업도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덮어뒀다가 나중에 해결할 경우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고객과 직접 접촉하는 기업일수록 위험 부담은 더 커진다. 생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 당사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돼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고쳐야 할 점이 많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교육을 꼭 받아야 할 사장이나 임원들이 바쁜 일정을 핑계로 인사만 하고 교육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이소장은 성희롱 예방교육이 직원 2백~3백명을 모아놓고 겉핥기 강의식으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대규모 강의보다는 소규모 토론과 구체적인 사례 위주의 교육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글=김상우.정현목 기자, 사진=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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