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몸 뚫고 나온 말의 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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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세상살이라면 쉽게 생을 긍정한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내뱉지 말라고, 시인은 얘기하고 있다.

헐벗고 굶주렸던 50의 험난한 생애를 마지막에 시가 구원하는 일도 고되긴 매한가지였다. 늦깎이 시인 최영신(사진) 씨의 첫 시집 『우물』은 말(시) 이 간단치 않은 몸을, 몸의 역사를 뚫고 나오며 흘리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돼있다.

첫째 장 '어머니를 기다리며'는 회상 시편들로 어린 시절 공부 대신 밭에서 일해야 했던 아픈 기억('밭이랑 나비') 을 떠올리며 시로 자화상을 그려낸다. 그 모습이란 "어느 날 대추는 이유도 모른 채 삼십오도 쐬주 속에 갇혀버렸어"(대추) 나 "발가벗은 여자/여자 아닌 여자/배꼽에 매달려 벌받는 여자/…/시간은 옷을 입히지 않는다/서러운 흔적들이 함부로 살아 나와/탯줄을 잡고 자궁 속을 태워/세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걸 꽃은 안다"(꽃) 에서 그려져 있다.

시인은 제 말을 찾지 못해 침묵으로 무뎌진 영혼의 틈에 돌멩이 하나 던지며 파문을 일으켜야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음을 안다."지금은 감각까지 인파에 부딛히고 떠밀려/마냥 덜그럭거리는 전철 속 손잡이에 수북이 구른 가을/그대가 지금 저 유리창 밖 흔들리는 검은 붓질에 엇갈린 한 점 초상화라면/창 안의 영혼과 창 밖의 영혼의 틈 사이/우리는 지금 아름답게 수목(樹木) 을 치고 있음인가/아니면, 정지선을 넘지 않으려는 틈 사이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틈과 틈 사이' 中)

숨가쁘게 이어온 시들은 '우물'과 '죽음'의 장에서 지나온 생과 다가올 죽음을 긍정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시인은 문득 나 혼자서만 힘들게 살았던 게 아님을 깨닫는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우물' 中)

최씨는 1950년 충남 금산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열여섯 남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난 뒤 중학 진학 좌절로 16세에 가출, 택시 기사 조수, 인삼 행상, 스탠드바 매점, 떡볶이 판매 등을 하다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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