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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없이는 장례가 없고 장례 없이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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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儀軌)는 조선시대 왕실·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준비과정·의식절차·진행·행사·논상 등에 관해 기록한 책을 뜻한다.

대개 세자·왕비의 책봉행사, 세자·왕의 결혼, 국장(國葬), 산릉(山陵)의 책조(策造), 왕후의 존호 및 선대왕과 왕후의 시호를 올리는 행사, 건물의 축조, 공신의 책봉행사, 어실의 개조, 어용(御容)의 도사(圖寫), 친경행사(親耕行事) 등이 있을 때는 그 행사를 주관하는 임시관청으로 도감(都監)을 설치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선조 33년에 만든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 殯殿魂殿都監儀軌〉·〈산릉도감의궤 山陵都監儀軌〉다.

명성황후의 죽음이 발단이 된 대한제국의 성립
한편 의궤에는 대개 각종 기용(器用), 복식, 건물 등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수록하는데 이를 의궤도라 한다. 의궤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반차도(班次圖)다.

반차도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차례대로 줄지어 선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반차도는 수십 쪽, 때로는 수백 쪽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이다. 이들 의궤와 반차도는 현재 규장각, 장서각,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들 의궤 중 몇몇은 현재 출판돼 일반인들도 그 모습을 세세히 훑어볼 수 있다. 이는 규장각 관장을 지낸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의 공이 크다.

최근 한영우 교수가 펴낸 『명성황후와 대한제국』(효형출판)은 효형출판이 세 번째로 펴낸 의궤 관련서다. 앞서의 책인 한영우의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과 신병주의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가 진경시대 나라의 존엄이 한껏 드높았던 시절에 만든 의궤를 다뤘다면,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은 나라의 힘이 점점 소진해가는 시절에 만든 의궤를 다뤘다.

앞서의 책이 정조의 화려한 화성 행차, 영조의 장엄한 궁중혼례를 다룬 데 반해 이번 책이 명성황후의 장례 절차를 다뤘다는 사실은 상당히 대비된다. 한 나라가 이렇게 저물어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쓸쓸함마저 인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네 가지 의궤, 즉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명성황후 빈전혼전도감의궤(明成皇后殯殿魂殿都監儀軌)〉, 〈명성황후 홍릉산릉도감의궤(明成皇后洪陵山陵都監儀軌)〉, 〈명성황후 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明成皇后洪陵石儀重修都監儀軌)〉를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의궤나 그 안에 담긴 반차도에는 제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존엄이 느껴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존엄이란 결국 그로부터 10여 년도 유지되지 못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 의궤는 당대의 눈으로 대한제국을 바라보게 한다. 당대의 눈으로 바라본 대한제국은 자주국가로서의 기강을 확립하려던 한 나라였다. 나라와 백성의 이런 의지에는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죽음이 발단이 됐다.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은 바로 이런 인식 하에서 명성황후의 장례 절차를 하나하나 따져나간 책이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된 것은 1895년 10월 8일의 일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그 후임으로 조선에 온 미우라 고로의 지도하에 일본인들은 마치 조선인들이 저지른 일처럼 위장하는 야비한 수법으로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무참히 학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다음날 미우라의 협박 하에 친일정권인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미우라와 김홍집 내각은 짜여진 각본대로 이 일을 훈련대 해산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의 소행으로 일을 몰고 가려했으나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의 목격으로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영우 교수는 이 사건을 당시의 호칭대로 ‘을미지변(乙未之變)’이라 부른다. 을미지변은 고종과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등 고종 구출작전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영우 교수는 아관파천이 비록 국가 위신상으로 문제가 많은 사건이긴 해도 “결과적으로 국왕이 주도하는 새로운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출발점이 됐으며, 대한제국을 탄생시키는 산실이 됐다”고 평한다. 아관파천에 대한 훨씬 적극적인 해석인 셈이다.

단순한 암기로 알 수 없는 역사적 배경 설명
아관파천 뒤, 고종은 김홍집 일파가 주도하던 왕비 재간택과 황후 폐위에 관한 조칙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황후의 국장을 자신의 주도로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준비 과정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의 황제 즉위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고종의 황제 즉위하면서 명성황후 역시 황후로서 국장을 치를 수 있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그해 11월 21일에 거행됐다. 〈발인반차도〉에 따르면,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만 대략 4,800여 명에 이른다고 나와있다.

이 책의 가치는 명성황후 국장이 대한제국 성립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는 사실을 의궤를 통해 밝힌 데 있다. 학교 국사 시간처럼 ‘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 성립’ 등의 순서로 암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복합적인 역사 인식을 던져준다. 한 교수의 방점은 을미지변을 당한 고종이 18세기 이래의 ‘민국(民國)’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에 찍힌다. 을미지변은 고종과 백성들에게 그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1895년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국상이 2년 2개월이나 미뤄진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김연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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