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무상보육에 묻힌 극빈층 의료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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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지방 A내과의원은 요즘 신장 투석하러 처음 오는 환자 중에서 의료급여 대상자는 받지 않는다. 국공립병원 등 큰 데로 돌린다. “병원이 꽉 찼다”고 둘러댄다. 사실상 환자 거부에 해당하므로 의료법 위반이다. 지난해 11월 다른 지방 한 허리 환자도 “치료가 어렵다”는 B병원 설명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주민등록번호와 병세를 얘기했더니 그런 대우를 받았다. 이 병원도 환자가 의료급여 대상자로 확인되자 진료를 거부한 것이다.

 의료급여 환자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서 진료비가 거의 무료다. 157만 명이다. 진료비는 정부(77%)와 지자체(23%)가 나눠 부담한다. 병원들이 불법을 무릅쓰고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이들이 ‘외상 환자’이기 때문이다. 매년 10월이나 11월이면 정부의 의료급여 예산이 바닥나 병원에 진료비를 지불하지 못해 외상이 깔린다. 외상 값은 이듬해 초 새해 예산이 나오면 갚는다. 늑장 지급하면서도 연체이자를 주지 않는다. 2010년 이후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외상 진료비가 6300억원으로 불어났다. 서울만 해도 1190억원에 달한다. 거의 모든 병·의원이 이런 고충을 겪고 있다.

 A의원은 지난해 10월부터 외상 진료비가 쌓여 6000만원에 달한다. 규모가 큰 병원은 수억원이다. 어떤 데는 직원 월급을 제대로 못 줘 임금 체불로 고발당하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병원이 어렵다고 의료급여 환자를 거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무작정 병원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진료의 질이 떨어져 그 피해는 결국 극빈층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의료급여 환자들은 평소에도 ‘의료급여 대상자’라는 낙인 때문에 은근히 차별받아 왔는데 외상 진료비 때문에 매년 이맘때면 또 한번 차별을 받는다.

 정부가 이런 문제를 풀려고 5000억원의 예산을 더 편성했다. 이 돈에다 지방정부 부담 예산(1400억원)을 합하면 외상 진료비가 모두 해결된다. 하지만 엊그제 국회에서 2800억원이 깎였다.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에 유탄을 맞은 것이다. 0~5세 소득상위 30% 가정에 보육료와 양육보조금을 지원하려 1조4000억원을 증액하면서 외상 진료비 해결자금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갔다. 이변이 없는 한 올 하반기에도 외상 진료비 사태가 반복될 것이다.

 무상보육은 정치권의 대표적인 선심성 정책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공약인 데다 민주통합당이 찬성하면서 다른 목소리 없이 통과됐다. 이를 반대해 온 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는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의료급여 대상자는 한국의 최극빈층 3%에 해당한다. 무상복지 바람에 이들의 인권은 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