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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 망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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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정재 논설위원

약방의 감초처럼 선거 뒤풀이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있습니다. ‘용한 점쟁이’ 얘기죠. 며칠 전 모임에서도 그랬습니다. 감초가 식당 안 사방팔방 널렸습니다. “백운 거사는 한 달 전 박근혜 당선을 맞혔네.” “지리산 도사들은 석 달 전부터 죄다 박근혜인 줄 알고 있었다네.” “박근혜의 모 측근이 올 초에 애기보살 찾아갔더니 틀림없다고 했다던데.”

 지인들의 무용담이 잇따를 즈음 문뜩 대산 김석진 옹이 떠올랐습니다. 야산(也山) 이달 선생의 뒤를 이은 주역의 대가, 그를 2009년 인터뷰했었습니다. 그는 당시 “2013년엔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데, 박근혜에게 대통령 운이 있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임기 중 통일의 기운이 열린다고도 했습니다.

 하필이면 2012년의 끝날, 대산 얘기를 꺼낸 건 망년(忘年) 때문입니다. 대산은 국가·사회의 미래는 짚어주지만 개인 점은 봐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대신 몇몇 단어의 의미를 풀어주곤 합니다. 그는 망년의 의미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망년은 망년(忘年)이자 망년(望年)이야. 세월을 잊고 자기를 잊는 것, 그래야 새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

 망년이란 단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기는 2300여 년 전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입니다. 장자는 망년을 ‘세월을 잊고, 나이를 잊는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과거는 물론 아예 인생 자체를 훌훌 털어버리자는 겁니다(돌이켜보면 대산은 장자의 망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게 어떤 경로를 통해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슬쩍 일본에 건너간 모양입니다. 1400여 년 전 일본엔 연망(年忘), 곧 망년(忘年)의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 망년 풍습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 땅에 상륙합니다. 요 며칠 전까지 우리네 위와 간을 괴롭혔던 망년회는 이렇게 돌고돌아 대한민국 대표 연말행사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게 다수설입니다.

 망년, 해 잊어버리기는 전염성도 꽤 되는 모양입니다.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도 건너갔습니다. 해마다 12월 28일이면 ‘제대로 털어버리는 날(Good Riddance Day)’ 행사가 열립니다. 잊고 싶은 기억을 종이에 적은 뒤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는 행사입니다. 2007년 처음 시작돼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았답니다. 군인 남편의 이라크 출정명령서, 백혈병에 걸린 10살 아들이 토할 때 쓰던 통, 바람난 남편의 사진, 헤어진 남자친구와 함께 본 연극 팸플릿, 공공요금 고지서, 휴지조각이 된 주식…. 지금까지 이 행사를 통해 분쇄된 기억들 목록입니다. 매년 ‘올해의 나쁜 기억’을 뽑아 몇백 달러의 상금을 주는데 올해는 뉴욕 롱비치에서 온 애덤 잉버가 받았습니다. 그가 갈아버린 기억은 ‘허리케인 샌디에게 받은 모든 이들의 고통’이었습니다. 행사를 기획한 타임스 스퀘어 얼라이언스 측은 홈페이지에 “한 해를 보내면서 ‘나쁜 기억’ 목록을 만든 뒤 큰 인형 속에 넣어 태워버리는 멕시코 풍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니다. 이런 행사를 광화문 광장에 가져오면? 나빠진 살림살이, 3% 밑으로 주저앉은 성장, 더 심해진 양극화, 김정은의 미사일, 성폭행 살인마 오원춘… 올해 갈려나갈 나라의 나쁜 기억들이 참 많기도 합니다. 더 나쁜 건 내년이라고 좋아질 것 같지도 않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타임스 스퀘어 못지않게 성황을 이룰 듯합니다.

 그렇다고 비관만 할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은 나이 한 살 더 먹을수록 운명론자에 더 가까워진다고. 이왕 운명론자가 될 거면 가능한 한 희망의 언어 쪽에 기대렵니다. 그래서일까요. 대산 김석진 옹은 잊는 망년(忘年)이 아니라 희망의 망년(望年) 얘기를 더 많이 했습니다. ‘내년엔 후천(後天:새 세상)이 열린다. 대한민국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온다. 경제는 2014년부터 좋아진다. 살 만해진다’.

 말 그대로만 된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내년 오늘엔 갈아 버려야 할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날이면 누구든 한 번쯤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는 오늘, 망년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