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파트릭 랑보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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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장(戰場)의 스펙터클을 영화가 독점했다고 했던가. 파트릭 랑보의 역사 소설 『전투』(원제 La Bataille)를 읽다보면 불길이 난무하고 날아온 포탄에 머리가 날아가는 전장의 아슬아슬함이 고스란히 몸 속에서 체현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전투의 스펙터클에 더해 등장인물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소심함 따위의 내면 풍경도 현실감있게 묘사되고 있다.

『전투』는 오스트리아가 1809년 나폴레옹군에 맞서 벌인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나폴레옹은 1808년 스페인 독립전쟁에서 패하긴 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낌새를 눈치채고 빈에 입성한다.

초기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군은 그러나, 물이 불어난 다뉴브강을 건너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다 패퇴하고 만다.

바로 이 에슬링 전투는 역사가 루이 마들랭에 의해 "대살육의 시대를 열었고, 장차 황제의 원정을 특징짓게 한다"고 평가받은 역사의 분수령이었다.30시간 동안 오스트리아군 2만7천명, 프랑스군 1만3천명이 죽었으니 3초에 한 명꼴로 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재미와 문학성을 겸비한 역사소설의 모범이랄 수 있는 이 소설은 이런 격전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역사적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되살려 냄으로써 강한 흡인력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을 라틴어를 사용하며 잘난체 하는 속 좁은 인물로 그려내며 작가 스탕달을 등장시킨다. 사병.장교.장군 등 여러 계층의 인물 묘사도 손색이 없으며 행동 묘사 위주의 간결한 문체도 외국 소설, 특히 프랑스 소설 특유의 만연체와는 거리가 멀다. 꼼꼼한 문헌학적 작업을 거친 저자의 성실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이 작품은 1997년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공쿠르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생계를 위해 30여년 동안 대필 작업을 포함해 역사 소설.패러디.희곡.시나리오 등 10만 페이지가 넘는 글을 써온 랑보가 본격 문학권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이다.

참고로 『전투』가 다룬 에슬링 전투는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가 1백70여년 전에 구상만 끝내 놓고 결국 작품으로 마감하지 못한 소재이기도 하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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