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과 1/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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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30면

무서움과 부끄러움 중 무엇이 더 강할까? 어느 쪽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더 규제할까? 13과 1/2층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김 부장은 무섭고 부끄러웠다. 김 부장이 다니는 회사는 임직원의 90%가 여성이다. 화장실 역시 여자 화장실이 많다. 원래 반반이었는데 성비를 고려해 남자 화장실 대부분을 여자 화장실로 바꾼 것이다. 김 부장이 근무하는 층에는 남자 화장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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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가려면 12층으로 가야 한다. 불편까지는 아니지만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다. 먼저 하나의 문을 통과하고 여자 화장실만 나란히 있는 복도를 지나 비상구 쪽 두 개의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다시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남자 화장실에 갈 수 있다. 모파상의 말처럼 “재능은 긴 인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인내했다가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이다.

아까부터 아랫배 쪽에서 몇 차례 신호가 왔지만 김 부장은 무시한다. 미동이 진동이 되고 다시 격동으로 바뀌어도 인내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 그것이 인내다. 그러나 작은 일과 큰 일이 한꺼번에 몰아 닥치고,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이 오면 그때 김 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없이 빠르게 먼저 하나의 문을 통과하고 예전엔 남자 화장실이 있었지만 지금은 여자 화장실만 나란히 있는 긴 복도를 지나 그 이름도 절묘한 비상구 쪽 두 개의 철문을 열고 자신의 처지처럼 가파르고 어두컴컴한 스물네 계단을 올라 다시 육중한 두 개의 철문을 통과하며 남자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이다.

12층 남자 화장실은 경쟁이 치열하다. 레드 오션이다. 다급하게 노크를 해보지만 이미 좌변기를 선점한 경쟁자가 독점적 지위를 느긋하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용중’이란 붉은 글씨가 배 아프게 일러준다. 기다릴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다. 모파상은 잊자. 김 부장은 17층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오름 버튼을 계속 누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16층에 근무하는 웨딩플래너가 반갑게 인사한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김 부장은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그저 엘리베이터가 빨리 움직이길 염원한다. “칼럼 잘 읽고 있어요. 저 부장님 팬이에요.” 김 부장은 대답도 웃음도 안 나온다. 초조하게 층수 표시만 노려본다. 12층, 13층, 그리고. 엘리베이터 3호기는 예민하다.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종종 일손을 놓고 침잠한다.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3호기는 두 번 정도 가늘게 탄식하더니 13과 1/2층에서 완전히 작동을 멈춘다. 좌변기가 절박한 김 부장과 자꾸만 말을 건네는 웨딩플래너를 가둔 채.

웨딩플래너는 침착하게 비상호출버튼을 누르고 경비실에 상황을 알려준 다음 안절부절못하는 김 부장을 위로한다. “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곧 정상작동될 거예요.” 진정되기는커녕 김 부장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폐소공포가 있군요? 가여워라.” 웨딩플래너는 어머니 같은 눈빛을 지으며 김 부장의 손을 잡아준다. 뭔가 자신의 몸 바깥으로 마구 뛰쳐나가려는 급박한 충동을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해 막아내느라 지지대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 부장의 손을.
그때 김 부장은 알았다. 무서움보다 부끄러움이 더 강하다는 것을.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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