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저, 싸가지 없는 50대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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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논설위원

대선 이후 50대가 공공의 적이 됐다. 89.9%의 투표율에 모두 놀라는 분위기다. 문재인 후보(이하 경칭 생략)의 패배 직후 한 지지자가 외쳤다. “국민들이 무식해 진 겁니다!” 졸지에 50대는 뭘 모르는 세대가 됐다. 이런 대선 분석도 있다. “50대의 몰표는 유일한 자본인 부동산을 지키려는 최후의 발악”이라고. 아파트에만 목매는 얼빠진 세대란 것이다. 어찌 이뿐이랴. 50대는 두 가지가 더 없다고 한다. 오래전의 “요즘 젊은이는 버릇이 없어 큰일”이란 구절에 빗대 “요즘 늙은이는 버릇이 없어 큰일”이라고 비아냥댄다. 마지막으로 50대는 뇌(腦)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대정신을 모른다고 구박받는다.

 요 며칠간 대학생 아들이 술에 취해 새벽 1~2시에야 들어온다. 25년 전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에게 당선증을 헌납했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 2030세대의 절망과 분노가 그때만큼 대단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노인들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하자”고, “19세 이하랑 마찬가지로 늙으면 투표권을 뺏자”는 분풀이가 인터넷에 나돌겠는가. 마치 50대를 상식·이타심·버릇·뇌의 4가지(싸가지)가 없는 분리수거 대상으로 간주하는 느낌이다.

 필자도 50대지만 굳이 변명하지 않겠다. 1987년 넥타이 부대로 대통령 직선제에 일조했고, 그 후 김대중·노무현에게 몰표를 던져 정권교체에 이바지했다고 자랑하지 않겠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도 대학 시절 중국 문화혁명과 홍위병을 최고로 치는 의식화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 공산권 붕괴로 깨달았다. 50대에겐 광주 민주화운동만큼 끔찍한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있다. 군대 시절인 83년 5월 “국민 여러분, 이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요란한 공습경보다. 중국 민항기 불시착으로 밝혀지기까지, 참호 속에서 실탄으로 무장한 채 전쟁의 두려움에 전율했다. 안보와 남북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왜 연평도 포격으로 20대의 상당수가 박근혜를 찍었는지도 충분히 이해한다.

 솔직히 이번에 50대가 ‘불만’보다 ‘불안’에 압도당한 게 사실이다. 그 불씨는 야당과 2030세대가 제공했다. TV토론 때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앙칼진 이정희에게 젊은 세대는 통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꼰대’들에겐 민주주의의 기초를 허무는 것처럼 비쳤다. 또한 이념을 떠나 누가 예의 없는 젊은이를 좋아하겠는가. 국정원 여직원 감금사건도 마찬가지다. 옳은 일이라면 수단이 과격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50대에겐 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연상된다.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해 무자비한 린치까지 서슴지 않았던 악몽이다. 좀 더 연장하면, 야권은 이번에 낡은 대학운동권 선거를 되풀이한 게 아닌지 궁금하다. 마치 단일화·세대 대결·투표율 제고가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50대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가 아닐까 싶다. 공지영·조국·나꼼수가 아무리 “내가 옳다”고 잘난 체해도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봤기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가르치려고만 드는 이들의 전지적(全知的) 작가 시점이 독선으로 비칠 뿐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는 ‘연령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이번에도 자칫 세상이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50대를 투표장으로 호출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조건 보수화된다는 것은 오해다. 오히려 50대는 ‘비판적 지지’에 익숙해 있다. 박근혜에게 열광하기보다 야권의 무리수에 실망했다는 게 온당한 분석일 듯싶다.

 대선은 끝났다. 앞으로도 50대는 조용히 지켜볼 게 분명하다. 자신들을 나치 지지자마냥 매도하는 독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박근혜가 유신이나 긴급조치로 퇴행한다면 가만있을 이들이 아니다. 50대는 그렇게 살아왔으며, 우리 사회가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나름의 판단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아마 박근혜의 운명도 이들의 몰표를 얼마나 부끄럽지 않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아들이 분노를 삭이고 좀 일찍 들어왔으면 싶은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