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간단하게, 하지만 싱싱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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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분류하자면 세상의 모든 책은 두 종류로 나뉜다. 철학책이나 문학책처럼 정신을 한껏 고양시키는 종류의 책들이 그 한쪽 면을 이룬다면 반대편에는 실용적인 목적을 중시한 매뉴얼로서의 책이 있다.

첫 번째 분류의 책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는지 몰라도 실은 어느 쪽이 더 좋은 책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용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은 그 분류가 모호한 책을 만나기도 한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공경희 옮김, 디자인하우스)이 바로 그렇다.

1. 『소박한 밥상』은 자연과의 대화를 담은 생태학 책이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은 잘 알려진 채식주의자다. 미국 버몬트의 산골짜기에서 자연과 하나된 삶을 살았던 니어링 부부는 필요한 먹거리를 경작하고 아주 적게 소유하며 평생을 살았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바로 이들 부부의 실천적 체험서라 할 수 있다.

헬렌 니어링의 가장 중요한 요리원칙은 ‘자연 그대로 먹기’와 ‘최소한의 양만 먹기’다. 가공과 보존 처리를 거치면서 재료의 특성이 없어지지 않은, 자연적이고 간단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라 말한다.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저장된 썩은 것’을 먹을 것이냐 아니면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푸성귀’를 먹을 것이냐. 그 단적인 예로, 헬렌 니어링은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음식은 만들지 않는다.

“독자들이여,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으시길.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32쪽)

빠르고 간단하게.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광고문구처럼 들리지만 그 뜻은 정반대다. ‘식사마저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하여 더 많은 일을 하자’는 게 패스트푸드 광고라면 ‘욕망은 줄이고 자연을 여유 있게 즐기자’는 게 헬렌 니어링의 철학이다. 그리고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솔직함’에 있다. 니어링 부부는 경직된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식단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최소한만 먹자’는 목표가 있을 뿐이다.

“여행 중 달걀이나 우유가 든 음식이 나오면 우리는 그대로 먹을 것이다. 만약 고기가 있으면 먹지 않을 것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그렇다. 하지만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매사에 일관성 있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을까?” (70쪽)

2. 『소박한 밥상』은 부엌으로 달려가 읽어야 할 요리책이다.
『소박한 밥상』을 요리책으로 분류한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요리책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재료를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하는지, 혹은 몇 분 정도 조리해야 하는지 등의 정확한 수치는 대부분 생략됐다. 초호화 컬러의,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멋들어진 화보도 없다. 헬렌 니어링은 그 이유를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 했다.

“분량이 애매하면,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좋은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실험해 보자. 놀이하듯 음식을 만들자. 좋아하는 조리법에 몇 가지 색다른 요소를 첨가해 보자.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시는 안 만들면 되지 않는가. (…) 아마 가장 애매한 조리법은 『늙은 농부의 달력』에 나오는 생강 과자 만드는 법이리라.

‘나는 언제나 밀가루를 준비한다. 굽고 싶은 케이크를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어야 한다. 버터밀크가 있다면 밀가루에 섞는다. 충분한 양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생강을 준비한다. 더 많이 넣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덜 넣고 싶으면 그렇게 한다. 나는 소금과 진주회 약간을 넣고, 그런 다음 존을 시켜 당밀을 내가 그만 넣으라고 말할 때까지 붓게 한다.’”(100쪽)

옮긴이의 글에서 공경희씨가 밝혔듯 이렇게 조리법이 모호한 데도 다리는 어느새 부엌으로 달려가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요리 이상의 것을 선사하는 헬렌 니어링의 설득력 있는 글솜씨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설탕 1/3스푼’과 같은 구체적인 수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음식에 대한 통찰로 가득하다.

“갈증이 나지 않을 때도 물을 마시는 동물은 유일하게 인간뿐이다. 인간은 음식을 더 먹기 위해 식사 때 물을 마신다. 수프나 스테이크, 솔트 크래커 등 양념이 많이 된 음식을 먹고 물이나 더 강한 음료 한두 모금으로 그 맛을 씻어 내린 다음, 음식을 더 먹고 물을 더 마시는 것이다.”(261쪽)

3.『소박한 밥상』은 지혜로운 인용문으로 가득한 뛰어난 에세이다.
『소박한 밥상』은 재미있는 에세이기도 하다. 헬렌 니어링은 이 책을 쓰기 위해 뉴욕 맨해튼, 필라델피아, 보스톤의 도서관을 뒤져 1만 4천 종의 요리책을 읽었고, 그 책들에서 뽑아낸 삶의 통찰로 가득한 문장을 본문에 인용했다. 인용문이 워낙 많아 헬렌 니어링의 게으름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그의 설명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나는 ‘도서관 중독증’에 걸린 셈이다. 술에 취하듯, 함축성 있는 인용문에 취한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다른 이가 먼저, 그것도 더욱 탁월하게 말한 대목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내가 대충 쓰는 대신, 그들의 좋은 글을 인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작가 서문 중에서)

헬렌 니어링에게 야단맞을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책 속에 있는 인용문만으로도 이 책의 본전은 너끈히 건지고도 남는다. 하긴, 헬렌 니어링의 사려 깊고 조용한 문장들에 값을 매긴다는 건 좀 멍청한 짓이기도 하니까. (김중혁/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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