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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가느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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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11면

마침내 곤(坤:)의 시대가 열렸다.
유천지명(維天之命) 오목불이(於穆不已)!
천명은 심원하여 그치지 않도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22> ·끝

주역 단사(彖辭)를 쓴 주공(周公)의 노래다. 시경에 전한다.

신(神)이 오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하물며 하늘이 하는 일은 아무리 좋다고 인간이 훔칠 수도,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천명론(天命論)이다. 천명론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에 따라 땅 위의 성현(聖賢)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유교의 정치사상이다.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천명은 하늘이 아니라 민심에서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에서 나오기는 일반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선인!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이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이래 자그마치 1116년 만에 여성 국가 리더십이 탄생했다. 역사에 아로새겨질 대업이다. 한국사 근래 천년은 불교, 유교, 기독교와 함께해 왔다. 남성중심적 사유체제는 내내 관통했다. 그랬던 것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이른바 건(乾:)의 시대가 가고 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이후로는 건곤이 번갈아 가며 조율(調律)하게 될 것이다. 음양이 조화로워야 태평하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느 때보다 어머니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대립을 끝내고 맞춤한 복지정책으로 성장의 그늘을 보듬어야 한다. 동시에 선진국에 진입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다. 욕심 같아서는 서둘러 남북통일도 하고 세계 문명사를 선도하고 싶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 시대 지식인의 총역량이 국운
지난 18일, 댓바람에 강권 교수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괘를 뽑아보자고 했다. 그 전에는 뽑을 필요가 없다더니만 그새 마음을 바꾼 것이다. 정보가 빠른 강 교수는 문재인이 골든 크로스를 지나 추월했다는 여론조사를 들었던 것. 진보 진영에 속한 그로서는 다시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괘를 뽑았다. 8시 정각이었다.

먼저 박 후보를 물었다. 곤(坤:)괘가 나왔다. 2·6효가 변동했다. 2효는 매우 길하다. 곧고 반듯하고 온전하다. 아는 게 적어도 불리할 게 없다. 문제는 6효다. 일반적으로 이 효가 나오면 흉하다. 그런데 큰 싸움판에서 여성이면 길하다. 절묘하다.

문 후보를 물었다. 손(損:)괘가 나왔다. 6효가 변동했다. 득신무가(得臣无家). 지지자를 많이 얻는 데 집이 없다. 청와대 입성 불가.

“역시 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로군요.”
강 교수는 코를 빠뜨리고 돌아갔다.

19일, 드디어 투표일이 밝았다. 투표율은 높았다. 여론조사 기관이나 언론, 민주당에서는 70%만 넘으면 민주당 문 후보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근거 있는 통계수치였다. 75%가 넘었다. 백두옹의 전화에 불이 났다. 당신이 틀렸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문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강 교수도 전화를 걸어 왔다.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주역도 별 수 없네요. 여러 데이터로 볼 때, 민주당 문재인 당선입니다!”
강 교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내질렀다.
“개표해 봐야 알지 않을까?”

백두옹은 가슴이 먹먹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늙은이가 동양 고전 철학서 주역을 가지고 망령되이 헛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너무도 분명했고 거듭된 신명이었으니까. 경주 이견대에 갔던 일, 종로 황학정에서 활시위를 당겼던 일, 계룡산 국사봉에 올랐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오매불망 나라 걱정이었다. 한 순간도 삿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틀릴 수가 있는가? 백두옹은 고개를 저었다.

TV를 켰다. 새누리당 여성 대변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반면에 민주당 여성 대변인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양당의 당사 풍경도 비슷했다. 짐짓 기다렸다. 입이 말랐다. 6시 정각 방송 3사 출구조사가 발표되었다. 박근혜 후보 1.2% 우세! 희비가 엇갈렸다. 외손자 내외가 다가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직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있다 전화가 울려댔다.

“어르신! 송구합니다. 어르신이 맞혔습니다. 과연 주역철학입니다.”
강 교수였다.

“자네들 진보진영 사람들! 왜 이리 가벼운가? 나꼼수고 트위터리안이고 선동했다가 아니면 말고야.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백두옹은 처음으로 진보진영 사람들을 싸잡아 나무랐다. 그렇다고 백두옹이 보수진영에 속하는 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도였다. 거듭 말했듯 주역철학은 득중(得中)의 길이자 시중(時中)의 길이다.

이제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갔다. 대나무 마디처럼 한 시대가 매듭지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문재인 후보는 깨끗이 승복했다. 해단식에서 그는 말했다. ‘친노의 한계일 수도 있고, 또는 민주당의 한계일 수도 있고, 우리 진영의 논리에 갇혀 중간층의 지지를 더 받아내고 확장해 나가는 데 부족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한마디로 주역의 핵심인 득중을 못했다. 처음 예상대로 안철수를 밀었더라면 필승이었다. 친노 중심 민주당은 4·11총선에 이어 대업마저 그르쳤다. 버릴 수 없는 오만과 탐욕이 패인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만 외쳐댔지 스스로를 혁신할 줄 몰랐다. 호랑이 털갈이는 어림도 없었다. 자기들 몫부터 악착같이 챙기고 거기에 맞춘 억지 논리,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어르신! 이제 작별해야 할 때가 왔군요. 그간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12월 21일 낮에 강권 교수가 또 찾아왔다. 한과 상자를 들고서였다.
“천하의 독설가 우리 강 교수도 애썼네그려.”
백두옹은 야윈 손으로 강 교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이었고 해피엔딩이로군요.”
“그래서 나는 괘 뽑는 걸 삼갔던 거라네.”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부턴 좀 더 신중하고 무게중심 있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트위터도 하지 않을 작정이고요.”
“안 한다고 했다가 곧 다시 하는 사람 많잖아? 중독됐으면 그냥 해도 되네. 나 여주 영릉에 좀 데려다 주겠나? 문득 세종대왕이 그립구먼.”

백두옹은 그렇게 영릉을 찾았다. 천민 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천체관측기구 모형 앞에 섰다. 명나라 천하에서 조선의 하늘을 열고자 했던 대왕의 소망이 담긴 기물이었다. 김담·박연·이순지·이천 같은 걸출한 과학자들이 동시대에 쏟아져 나와 발명의 시대를 열었다. 김종서·맹사성·정인지·하연·허조·황희 같은 대신과 강희안·박팽년·성삼문·신숙주·이개·이선로·최항·변계량·김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 드림팀이 되어 세종을 도왔다.

대왕 내외의 합장릉에 참배했다. 세종대는 분명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하지만 시절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가뭄은 극심했고 곧잘 흉년이 들었다. 측우기를 발명하고 농사법을 계량했다.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도 잦았다. 이종무는 남진하여 대마도를 정벌했고, 김종서는 북진하여 여진족을 몰아냈다. 가장 뛰어난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한글 창제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에 한없는 백성 사랑의 마음이 낳은 업적이다.

천리마(千里馬)는 늘 있지만 그 말을 잘 모는 백락(伯樂)이 늘 있는 건 아니다. 인물이 많아도 그 인물들을 잘 활용할 큰 지도자가 자주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세종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필요가 창조를 낳는 거니까. 그 시대 지식인의 총역량이 국운이다. 뛰어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불러다 쓰는 국가 리더십이 국운을 좌우한다.

사람을 잘 써야 바르게 다스려지는 법
박근혜 당선인!
두 달 뒤면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에 취임한다. 지금 당선인 주변에 어떤 공신들이 포진해 있는가. 전에 뽑았던 괘에서 개국승가(開國承家)에 소인물용(小人勿用)하라 했다. 공을 세웠다고 소인배를 등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경고였다. 주역의 신명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이르는 것 같아서 아주 섬뜩했다.

백두옹은 한국 역사 속 드림팀을 구성해 보았다. 대통령 자문역으로 광개토대왕·문무대왕·세종대왕·정조대왕. 책임 총리에 동인·서인 가리지 않고 탕평 인사를 펼치려 했던 이이. 교육부 장관에 설총·최치원·이황. 지식경제부 장관에 정약용. 법무부 장관에 조광조. 국방부 장관에 을지문덕·강감찬·조헌·이순신. 보건복지부 장관에 김만덕. 외교통상부 장관에 서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왕인·평강공주·원효·의천·김정희. 여성가족부 장관에 신사임당·허난설헌….

꿈같은 인재풀이다. 입현무방(立賢無方)으로 친소나 귀천에 구애되지 않고 불러 쓸 수 있다면 세계사가 바뀐다. 유감스러운 건 모두가 역사 속 위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불러다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정신이야 왜 못 본받겠는가. 모름지기 당대의 인물 가운데 지역과 세대, 이념, 성별을 가리지 말고 고루 찾아 쓸 일이다. 그래야 정도를 걷는 대통령, 정도령(正道領)이 된다.

백두옹은 집으로 돌아와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펼쳤다. 웅혼하고 힘찬 글자들이 압권이었다. 광개토대왕은 5세기 고구려 융창기를 이끈 영웅이다. 하석(何石) 박원규 서예가에게 비문에서 집자해 치국재어용인(治國在於用人)을 쓰게 했다. 대통령이 사람을 잘 써야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진다.

끝으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동안의 국운을 뽑았다. 역시 곤(坤:)괘가 나왔다. 신기하게도 거듭된 곤 괘다. 2·3·5효가 변동했다. 통기변(通其變)을 했다. 3효가 나왔다. 임기 5년 전반기는 아주 좋다. 함장가정(含章可貞)이니 아름다운 뜻을 가슴에 품고 곧게 간직한다. 후반기는 어려움이 많다. 우물을 청소했는데 흙탕물이 가라앉지 않아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레박질을 하면 국민과 함께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대통령이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변화의 철학서 역(易)은 말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시대가 변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리더십도 확 변했다. 이제 크게 통할 차례다. 바라옵건대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오래오래 융창하길!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등을 썼으며 최근에 『근대를 산책하다』를 펴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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