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본만화 번역가 서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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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배가본드』 『반항하지마』….

이 만화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하나는 만화출판계의 극심한 불황에도 권당 2만~5만부씩 꼬박꼬박 팔리는 '효자 상품'이라는 것. 또 하나는 모두 서현아라는 번역가의 손을 거쳤다는 것이다.

서현아(30) 씨는 또래인 이석환.박연 등과 더불어 최근 만화출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본 만화 전문번역가 중 한명이다.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작품을 고를 정도로 유난스러운 열혈 독자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1990년대 초반 해적판 만화를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했던 사람들이 '1세대'라면, 만화 번역을 직업으로 하는 그녀는 '2세대'정도 될까.

그녀가 번역했던 작품들을 보면 출판사에서 'A급'으로 꼽는 번역가답게 히트작이 많다.

『미스터리 극장 에지』『야와라』『은과 금』등 자신도 제목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한달에 평균 열두권 가량 번역하는 강행군을 해온 지 4년째니 5백권이 훨씬 넘는 셈이다.

다른 '2세대' 만화번역가들처럼 그녀도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품었지만, 그녀의 말을 빌면 "재능이 없어" 곧 접었다. 대신 시작한 것이 일본어 공부.

하루에 일본어로 된 종이쪽지 하나라도 반드시 읽고 잔다는 끈기로 공부해 번역판에 뛰어들었다.

"제일 무서운 건 독자에요. 다른 분야보다 매니어가 많고 또 그 깊이도 상당해서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요." 한 예로 『20세기 소년』에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친구(朋友) '라는 존재가 나오는데, 이를 가타가나 그대로 '팡야오'라고 썼더니 금세 출판사 홈페이지에 "'펑여우'가 맞다"며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오더라고 했다.

잘 모르는 분야의 용어는 주로 일본 사이트의 데이터 베이스를 검색해 자료를 찾는다. 유도를 소재로 한 『야와라』는 지난해 시드니 올림픽의 TV 중계를 보면서 용어를 참고했다. 골프만화인 『하늘의 스바루』를 위해서는 일간지 스포츠면을 탐독한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고스톱 용어를 쓰는 것처럼 일상 생활에서 마작 용어를 자주 써요. 마작을 잘 모르면 영 번역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죠."

만화도 더이상 저급한 오락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품위있는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는 게 그녀의 바람이다. "이틀에 한권 번역해야 하니 시간이 너무 빠듯해요. 단 하루만 여유를 더 줘도 보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할 수 있는데 아쉽죠. 돌이켜보면 저도 부끄러운 번역이 많았어요." 지금처럼 출간되는 만화의 종(種) 수가 많아서는 양질의 번역은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만화 번역자 이름이 책 겉장에 표기되는 경우도 많지 않아요. 그만큼 출판사들이 만화 번역을 볼펜하고 사전만 있으면 되는 쉬운 작업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이겠죠."

그녀는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 만화 번역이 결코 쉽지 않다"며 번역한 만화 중 최고를 묻자 "무사의 그림이 너무 멋져 단숨에 번역했다"는 『배가본드』를 꼽는다.

기선민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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