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부자여, 돈을 쓰시오

중앙일보

입력

'경제가 어려울수록 건전한 소비가 필요합니다.' 한국은행이 건물벽에 내건 이 구호는 요즘 애들 표현을 빌리면 "헉"이다. 놀랍다는 얘기다.

경기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근검절약을 생활화합시다'란 표어에 워낙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로서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더구나 물가안정을 첫째 목표로 삼고 있는 중앙은행이 이렇게 외치고 있으니, 뭐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들도 적지 않을 듯싶다.

*** 소비확대 구호 내건 韓銀

과거의 잣대로 보면 한은의 이 구호는 도발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저축추진중앙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축을 독려하고, 은행들로 하여금 예금계수 경쟁을 시키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한은의 모습은 오히려 때늦은 감도 있다. 경기흐름을 읽고 그때 그때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저축장려기관이 아니라 성장의 속도를 제어하는 사령탑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은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처럼 아직은 경제정책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일을 맡아야 한다는 당위론에서 보면 자신의 판단과 의중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엔 생산이 경제활동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소비가 성장의 큰 축을 형성한다. 미국의 경우 성장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2에 달한다.

우리나라도 거의 그 수준이다. 올 상반기에 일궈낸 국내총생산(GDP)중 60%가 소비활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소비가 줄어들면 경제의 활력이 더욱 떨어지는 구조가 된 지금 소비확대를 강조하는 일은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래도 수긍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테러니 전쟁이니 해서 미국 등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진다고 하는 판에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야지 더 쓰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소비는 불황일 때 아쉬운 것이다.

경제가 잘 돌아갈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의 주머니가 두둑할 때는 이런 구호가 필요없다. 그냥 둬도 사람들이 돈을 잘 쓰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지면 소비도 따라 감소한다. 연장근무가 사라지면서 수당이 줄고, 주가도 맥을 못춰 가욋돈을 만져보기도 어려운 탓이다. 이때 필요한 게 소비다.

소비 캠페인은 그럴 여유가 있는데도 사회적 분위기에 눌려 돈을 못쓰는 사람들을 향한 소리다. 동시에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가진 이들이 돈 좀 쓴다고 해서 너무 고깝게 보지 말자는 의도도 담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가진 사람들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다. 재산형성 과정에 대한 믿음 부족 탓이기도 하고, 잘못된 평등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진 사람들은 돈을 씀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경제가 안좋을 때 그렇다. 얼마 전에 이런 보도가 있었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체어맨과 같은 고급차는 잘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부자들의 이같은 소비행위가 사회적 위화감을 조장한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 갑 열어야 서민들 혜택

위화감을 없애겠다며 부자들의 지갑을 틀어막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러면 체어맨을 만드는 쌍용자동차의 자금사정은 나빠질 것이다.

체어맨이 잘 팔리면 쌍용차 직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만, 안 팔리면 이들의 주머니는 얇아진다. 체어맨을 타는 사람들은 부자들이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민이나 중산층이다. 이게 부자가 돈을 써야 사회적으로도 보탬이 되는 이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은의 구호에는 오류도 보인다. '건전한 소비'라는 표현이다. 소비는 소비일 뿐, 건전한 소비와 그렇지 않은 소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은 서민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씀씀이가 다를 뿐이다.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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