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토크쇼] 역사 대중화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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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서시장에서 역사물의 비중은 괄목할 만하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양적 증가보다 질적 변화다. 한국사의 경우만 해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역사서를 통해 역사의식을 대중화하려는 노력은 1990년대 초반 비전공 저자들의 도입단계를 지나 이제 전문적 연구성과를 갖춘 저자들의 참여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전문성만 강조하다 전문가들의 암호로만 그치거나, 흥미만 좇다 근거가 빈약한 소설적 상상력에 그치는 한계를 모두 극복하고 전문성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역사물의 본격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난 4년간 주목할 만한 역사서를 잇따라 펴낸 역사물 전문출판사 '푸른역사' 의 박혜경 대표와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한명기(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박사가 만나 대중적 역사서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이들은 보다 엄밀한 전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글쓰기의 당위성에 공감했다.

사회=평범한 사람들의 삶까지 다룬 책 등 대중적 역사물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뻗어가는 느낌이다. 역사 대중화를 꼭 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 문제부터 짚어보자.

한명기=어린이용 '이순신 전기' 와 별도로 성인이 읽고 공감할 '이순신 평전' 이 없는 현실은 문화적 후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경할 위인이 없다고 하는데, 실제 없는지 아니면 읽어보고 감복할 만한 대중적 역사물이 없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독자의 성장 단계에 맞춘 역사 대중물이 필요하다.

박혜숙〓사회적 문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역사서 대중화의 분수령은 96년 나온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였다. 소장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주제와 글쓰기는 이제 드디어 전문가가 참여하는 대중서 출판의 시작을 알렸다. 그 책만해도 한 저자가 원고지 50장 가량을 쓰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1천장 분량의 단행본이 나오는 단계다.

사회〓전문성과 대중성의 갈등과 조화는 출판의 역사만큼 오래된 주제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연구자와 출판사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가.

한명기〓대중적 역사물이 질적 도약을 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학문적 연구 업적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 연구성과가 풍부해야 그걸 토대로 대중화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중적 글쓰기의 필요성은 50대 이상 중진 교수들도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박혜숙〓97년 10월 출판사를 창업할 때 만 해도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써서, 사람냄새가 나며, 쉽고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 모토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과 인식이 바뀌었다. 4년전 출발할 때보다 지금은 대중서에 대한 공감이 상당히 이루어진 것이다. 한선생 지적처럼 문제는 어떻게 대중화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한명기〓일본의 시바 료타로나 진순신의 대중적 작업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기존의 학문적 성과가 풍부하게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야를 뒤져도 대중적 저자들이 재미있게 가공할 기초 연구자료가 풍부하단 얘기다.

박혜숙〓출판사 입장에선 현재의 시의성에 적합한 필자를 찾기 힘든 것이 큰 애로 중 하나다.

한명기〓어느 필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학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학계는 기존 서술방식의 타성에 젖어 탈피 노력이 적었다. 일본책을 파는 서점을 가보면 책 제목만으로는 안팔릴 것 같은 책들도 몇십쇄씩 찍어낸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사회〓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재 얘기를 어떻게 과거사실과 결합하는가가 대중적 글쓰기의 어려움일 수 있겠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고 있는가.

박혜숙〓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사료부족이 우선이다. 실증적 훈련만 받은 전문가들은 정황적 증거만으론 논문에서 언급도 못한다. 대중적 역사물이라도 소설적 상상력은 곤란하다. 기획자 입장에서 그 경계를 어떻게 조절하는가가 고민이다.

한명기〓대중적 역사서의 도입단계에서 어쩔 수 없이 소설적 상상력까지 허용됐다곤 해도, 이제는 독자의 안목이 높아졌다. 실증이 무시된 책을 보면 당장은 통쾌한 결말에 시원할지라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생각하면 허무해지고 만다.

박혜숙〓대중의 수준도 세분화가 필요한데, 우리는 매니어층에 착목하려고 한다. 대략 3천명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97년 출발할 땐 전문성과 대중성의 구분이 확실했다. 대개 비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결합단계다. 전공자가 대중서 집필에 참여한 것이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앞으론 차원을 달리 해 다시 구분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명기〓그럴 가능성이 크다. 전문성과 대중성이 분화돼선 독자의 높은 수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사교육에 불신이 팽배할 땐 '다시 쓰는…' '…거꾸로 보기' 등의 책들이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인터넷 등 전방위적 정보확산 단계에선 '거꾸로 읽기' 등의 효과는 떨어질 것이다. 이제는 내용으로 승부할 단계다.

사회〓대중서에서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나.

한명기〓대중서의 아킬레스건이다. 내가 지난해에 펴낸 『광해군』(역사비평사) 의 경우 각주는 안 달고 뒤에 참고도서 목록만 달았다. 출판이 문화적 활동이고 창작활동이라면 지적 소유권은 점점 중요해진다. 앞으론 대중서에도 핵심적 각주는 꼭 달아야 할 것이다. 각주 대신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녹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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