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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제국을 움직이는 거인들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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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의 반역자’중 한사람인 로버트 노이스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를 창안해 명성을 얻는다. 컴퓨터의 진공관을 트랜지스터로 대체하려면 이것을 하나씩 연결해 전자회로를 구성해야 하는데, 사교적이고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몸을 가진 이 과학자는 실리콘 조각 위에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방법으로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또 한사람, 고든 무어는 사려 깊은 화학자로 어느날 모눈종이와 자를 갖고 간단한 그래프를 그렸다. x축에 시간을 놓고 y축에는 실리콘 칩의 성능을 놓고 몇년 간의 추이를 점으로 이어가다 보니 칩의 파워가 24개월마다 2배로 커지고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나중에 그 기간을 18개월로 수정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무어의 법칙’이다.

그동안 페어차일드로 옮긴 8인의 반역자는 뉴욕 본사의 지나친 간섭에 반발해 하나 둘씩 떠나고 노이스와 무어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실리콘밸리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다른 회사에 들어가거나 창업에 가담한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눈부신 주말 오후, 노이스와 무어 두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이야기하다 앞으로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무어가 사업계획을 짜고 노이스가 자본을 물색하기로 했다. 돈을 모으는 일은 전화 한 통화로 해결됐다. 그날 오후에만 240만달러를 끌어들였다. 두사람의 이름만으로도 통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8년 인텔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해 여름은 이런저런 일로 길고도 무더웠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정부와 맞섰으며 미국 시카고에서는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했다. 바로 ‘68혁명’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해였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새 혁명이 실리콘밸리 한쪽에서 잉태되고 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이 조그만 회사가 우리 생활에 큰 변화를 몰고 오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람을 모으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를 수 있을 만큼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산책임자로 앤디 그로브를 데려오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제조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엔지니어라기보다 물리학자였고, 미국인이라기보다 아직도 헝가리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노이스와 무어는 인텔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그로브에게 맡긴다.

그해 그로브를 만난 사람이라면 그를 정상적인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영어 악센트는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머리에는 기묘한 청취 보조장치를 쓰고 다녔다. 그의 일에 대한 자세는 소련의 노동자 영웅에 가까웠다. 아침 8시에는 회사 자기 자리에 앉아 일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INSIDE INTEL: Andy Grove and the Rise of the World’s Most Powerful Chip Company”라는 책에 자세히 묘사돼 있는 여비서와의 일화는 그로브의 일에 대한 엄격한 자세를 잘 설명해 준다.
출근한 지 1주일밖에 안된 여비서는 출근하자마자 그로브의 호출을 받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세번이나 늦었다.”
여비서가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었다.
“인텔에서는 오전 8시 정각에 일을 시작한다. 내 비서가 이렇게 늦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을 지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로브는 사내에서 악명이 높았던 지각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반도체회사는 생산 공정에 한치의 오차라도 있어서는 안되며 조그만 실수라도 일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직원들을 몰아붙였다. 생산책임자로서 규율과 통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탈출해 나온 전체주의 국가의 영향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사람들이 그에게서 주목한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주 명석하고 논리정연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노이스와 무어가 이 자리를 맡길 때 리스크를 감수한 결정이라는 것을 그로브는 알고 있었다.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노력했다.

인텔은 처음부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반도체 기억소자(memory devices)를 만드는 일이었다. 노이스가 창안한 집적회로는 논리소자(logic devices)에는 사용되고 있었지만 메모리 분야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코어(magnetic core)가 쓰이고 있었다. 메모리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보다 크기는 작아지고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인텔만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과 연구소들이 반도체 기억소자를 개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인텔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이유를 “마이크로코즘”의 저자 조지 길더는 실리콘만을 사용한 장치를 만듦으로써 극소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ROM(read only memory)·RAM(ran-dom access memory)·CPU(central process-ing unit) 등 퍼스널 컴퓨터의 중요한 부품 개발은 인텔이 설립되고 첫 3년간에 모두 이뤄진 것이다. ‘기이한 3년’이라고 조지 길더는 말한다. 인텔이 이런 부품을 만들기 전까지 컴퓨터는 덩치가 크고, 만들려면 수만달러가 들었으나 이제 몇백달러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불을 댕긴 것이다.

오늘날 인텔의 주력 상품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창안하게 된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결과였다. 당시 돈이 아쉬웠던 인텔은 무슨 일이든 해야 했는데 그때 일본의 닛폰계산기라는 회사가 8개의 칩으로 논리회로망을 돌릴 수 있는 좀 복잡한 데스크톱 계산기를 설계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검토하던 인텔의 젊은 엔지니어 테드 호프는 ‘논리를 기억으로 대체’하는 발상의 전환을 한다.

곱하기와 나누기 같은 계산 문제를 푸는 일은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영구적인 회로망을 만듦으로써 할 수 있다. 그러나 곱하기와 나누기는 더하기나 빼기의 반복 형태로 볼 수 있으므로 따로 회로망을 만들 필요가 없다. 기억장치 속의 프로그램으로 하여금 더하기 회로에 명령하여 곱하기나 나누기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반복적인 절차를 행하게끔 하자는 것이 호프의 생각이었다. 즉, 계산기 안에 기억장치를 넣자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인텔은 여러 개의 기억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호프는 CPU·RAM·ROM·입출력 장치를 한데 모은 칩세트를 디자인한다. 일본 회사는 처음에는 이 아이디어에 시큰둥했으나 이 장치의 장점을 알고 난 뒤에는 10만달러를 선금으로 내놓으면서 개발을 독려했다. 인텔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 계산기시장은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인텔에 본래 약정한 금액을 다 지불하고는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닛폰계산기는 값을 깎아 달라고 한다. 노이스는 6만달러를 돌려주는 대신 이 디자인을 다른 회사에 팔 수 있는 권리는 인텔이 갖겠다고 제안한다. 일본 회사도 경쟁회사에만 안판다면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인텔의 운명을 좌우한 중요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좀 뒤의 일이다. 이때 노이스가 일본 회사의 요구에 다른 식으로 접근했다면 오늘날의 인텔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텔은 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1971년 처음으로 4004라고 이름붙인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놓는다. 곧 이어 다음해에는 8비트의 8004를 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소년 빌 게이츠는 동네 전자부품 가게에서 이것을 사기 위해 폴 앨렌과 돈을 모아 360달러를 만들었다. 미래의 소프트웨어 제왕은 이것으로 교통량을 조사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사이버제국을 움직이는 거인들

1. 선 마이크로시스템을 만든 동갑내기 4명의 이야기
2.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스탠퍼드의 아이들’
3. '화살 하나에 모든 승부를 건다’
4. 반도체혁명 주도 인텔의 앤디 그로브
5. 8인의 실리콘밸리 창시자들
6. 인텔의 운명을 결정한 '기이한 첫 3년'
7. 잇따른 빙산 피할 수 있었던 인텔의 행로

이종천 뉴스위크한국판 기자
자료제공:월간중앙(http://monthly.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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