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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중앙일보

입력

"술은 지난 일들을 불러들이고, 지난 일들은 술을 부른다. "

우리 전통 술에 얽힌 일화들을 상기시키는 신간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은 '술로 빚은 우리 문화 답사기' 다. 23종의 우리 술을 찾아 떠나는 저자의 발길마다 근대화 물결 속에 잊혀진 기억들이 오롯이 되살아 난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술은 술이 아니다. 그것은 땀과 눈물, 그리고 삶의 희망을 함께 섞어 만들어 낸 우리 문화의 정수(精粹) 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상품이라기보다 예술이다.

누룩만해도 단순한 밀기울 덩어리가 아니다. 그 속에는 그 지방의 물과 공기와 햇살과 바람이 들어 있다.

사람의 손끝에서 완성되지만 그 지방에서만 떠도는 곰팡이들 없인 빚어낼 수 없는 작품이다.

"시(詩) 속에나 남아 있는 줄 알았던 술 익는 마을도 있고, 목숨걸고 누룩 빚던 마을도 고스란히 남아 있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술을 빚는 사람도 있고, 빚은 술이 아까워 팔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

정성과 연륜으로 빚어진 술들엔 대량 생산과 대량 유통, 대량 소비되는 현대의 술에서 찾을 수 없는 개성과 향과 맛이 스며 있는 것이다.

속절없이 떠오르는 개인적 추억이 술을 재촉하기도 하지만 그 술 자체에 얽힌 역사를 알면 술의 맛은 멋으로 승화된다.

먼저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 를 보자. 1597년 전주 모악산의 수왕사(水王寺) 를 중창한 진묵대사가 손수 빚어 먹던 곡차였다는 이 술을 지금은 그 절의 주지 벽암(碧巖) 스님이 만든다. 4백년 넘은 역사도 그렇지만 우선 절 이름이 '물의 왕(水王) ' 임에 주목하게 된다.

좋은 물로 만든 곡차를 놓고 스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가(佛家) 의 금기사항 중 하나인 술을 곡차라 부르며 선승들은 그 금기의 벽에 쪽문을 내고 드나든 셈인데, 이를테면 "금기는 존재하지만 그 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것" 이다.

벽암은 말한다. "가슴을 열어 가슴으로 술을 빚는다. " 벽암에게 술은 하나의 화두다. 저자는 말한다.

"수왕사여, 술의 왕이 되어 금기로 가득 찬 내 인생의 벽에 쪽문을 내어다오. 자유의 문을 달아다오. 합장. "

저자의 술 기행의 백미는 아무래도 '낙안읍성 사삼주' 다.

전남 벌교 부근의 낙안은 우리 옛 읍성을 전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삼주는 제석산 일대의 더덕으로 빚은 술. 저자는 사삼주 한 잔을 놓고 자신이 잡지 『샘이깊은물』기자 시절 발행인었던 고(故) 한창기 선생을 떠올린다.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이기도 했던 한선생의 마지막 꿈이 이곳 낙안의 읍장이 되는 것이었다.

한선생은 낙안을 전통과 현대가 어울어진 공간으로 만들고 싶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저자에 의해 "가장 세계화된 눈으로 우리 것을 보았던 사람" 으로 되살아 난다.

이 밖에 이 책엔 '경주 교동법주' '부산 산성 막걸리' '외암리 연엽주' '전주 이강주' 등 전국 유명 술도가의 옛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어느 대목을 잡아도 술맛나게 하는 일화들이다. 원료와 제조방법도 시시콜콜하게 설명해 놓아 우리 술에 대한 기초 정보 창고 역할을 한다. 이쯤되면 술 한잔이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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