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금리 쇼크] 下. 칼날 세운 기업 자금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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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을 조달하기는 쉬운데,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 자금조달 계획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의 한 재무담당 임원은 "자금을 구하기는 쉽지만 투자 여부가 결정되지 않아 자금조달 규모를 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 고 말했다.

초저금리 시대에 기업들이 색다른 고민에 빠져 있다. 은행대출금리보다 회사채수익률이 낮아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차환(借換)발행해 더 낮은 금리로 '바꿔 끼우기' 는 하지만, 새로운 자금조달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 자금조달 규모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가 침체된 데다 미국 테러사건의 영향으로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투자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LG그룹 재무팀 관계자는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는 내년 하반기까지는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별로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 금리테크 실력이 드러난다=철강제품을 생산하는 S기업은 이달 중순 3년 만기 회사채 4백억원을 차환발행했다. 연 14~15%대의 금리로 발행했던 회사채를 연 6%대 후반의 조건으로 갈아끼운 것.

이 회사 관계자는 "신규자금 조달 시기와 회사 자금의 입출금 시기를 연결시키지 못하면 역마진이 생기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다" 고 말했다.

SK 재무팀 관계자는 "은행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쉽기 때문에 풍부한 자금을 어떻게 적절하게 관리(포트폴리오)하느냐에 따라 한해 수익이 수백억원씩 왔다갔다 할 수 있다" 며 "초저금리 시대를 맞아 대기업 재무팀의 실력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올들어 차입구조를 바꾸고 있다. 현재의 싼 금리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비싼 금리로 차입했던 돈을 갚고 있다.

◇ 유동성을 중시한다=초저금리라고 기업들이 무턱대고 금리테크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니다.

신용도가 높아 비교적 싼 금리의 자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덜 겪는 업체들은 자금의 비용절감(금리 낮추기) 못지 않게 자금의 리스크 감소(유동성)를 중시한다.

삼성그룹 재무팀 관계자는 "저금리의 매력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일에 대비해 실탄을 확보하는 일에도 치중하고 있다" 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하반기 들어 5천억원의 회사채를 두 차례나 발행한 것도 기존의 고금리 회사채를 갈아끼우겠다는(10%대 금리를 5%대로 낮춤) 의도 이외에 반도체 불황의 장기화에 대비해 실탄을 비축하려는 의도라고 회사 관계자는 말했다.

LG그룹 재무개선팀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금리가 낮으면 이자부담이 줄어 기업의 수익구조가 좋아지지만 현재의 초저금리는 전반적인 경기위축에 따른 것이어서 장기적으로 매출 및 수익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 말했다.

그는 "자금조달에 전혀 문제가 없어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경영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고 덧붙였다.

◇ 회사채.해외사채 발행이 늘어난다=지난해 지지부진하던 회사채 발행이 올들어 급증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비해 대기업의 증가세가 뚜렷하다.

올들어 7월까지 대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은 20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조원)의 2.5배나 된다.

현대자동차 재무팀 관계자는 "신용등급이 좋아 3년 만기 회사채를 연 6%대에 발행할 수 있다" 면서 "은행들이 돈을 빌려쓰라고 야단이지만 회사채 금리와 은행 대출금리의 차이가 워낙 커서 은행돈을 한푼도 빌려쓰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외화부채가 적어 해외에서 변동금리부 사채(FRN)를 발행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금리는 리보(런던은행간 금리)에 연동하는데, 리보가 낮아져 25일 현재 발행금리는 연 4.54% 수준이다.

포항제철은 지난 19일 4.50% 정도의 금리로 1천억원의 FRN을 발행했다. 포철 관계자는 "달러가 약세를 보일 경우 해외사채는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어 우량기업들이 해외사채를 선호하고 있다" 고 말했다.

김동섭.홍승일 기자 don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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