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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작은 씨앗 하나를 거룩한 숲 속에 보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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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평생 부모님은 이웃에게 정을 많이 주셨고…유지를 받들어 작은 씨앗 하나를 거룩하고 숭고한 숲 속에 띄워 보냅니다.’ 계속되는 강추위로 온몸이 얼어붙는 요즘, 1억원대의 수표와 함께 자선냄비에서 발견된 짧은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구세군에 따르면 지난 9일 저녁, 서울 명동 입구의 모금 현장에 중년의 신사가 다가와 “어려운 노인분들에게 써달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놓고 갔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도 이 신사로 보이는 사람이 역시 편지와 함께 1억원을 기부한 바 있다. 편지에는 ‘부모님이 호강 한 번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짐작하건대 자수성가한 분이 2억원이라는 거액을, 신원을 감추고 기부한 셈이니 감동은 두 배, 세배로 커진다.

 살림살이가 빠듯해졌는데도 이름 없는 천사들의 아름다운 사연은 전국 곳곳에서 들려온다. 제주 서귀포의 한 면사무소에는 2년째 쌀 100포대가 배달됐고, 창원시청 앞에는 마른 고추 6포대가 놓여 있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공식 모금기관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를 조직해 운영 중인데, 188명의 회원 중 23명이 실명 공개를 꺼리고 있다고 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00도를 목표로 하는 온도탑 수은주는 어제 현재 35.6 도로, 지난해 이맘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불황 속에서도 기부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더욱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기부자가 많아진 것은 어려울수록 이웃을 조용히 돌아보는 숨은 온정이 우리 사회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선 주자들은 수백조원이 들어가는 복지공약을 쏟아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다, 이런 공약 대부분이 지켜질 수 없음을. 정부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모두 구제해 줄 수는 없다. 국가와 함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나눔을 실천해야 성숙한 복지국가로 갈 수 있다. 명동 노신사의 표현대로 ‘작은 씨앗 하나’를 보다 많은 사람이 보내야만 ‘거룩한’ 사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