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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 계급에 주목… ‘시대’ 시리즈 4부작 남긴 좌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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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28면

역사는 선사시대 이후 인류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인문학의 기본인 역사학은 과거에 이뤄진 사건의 실체적 사실과 조류를 분석하고 그 변화와 진행 과정을 추적해 미래 예측으로 이어주는 학문이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쓰여야 할 역사가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악용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정착된 역사관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재정립하고 아울러 역사의 해석도 후대로 미루지 않고 당대에 확립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반주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역사학의 아버지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다. 기원전 484년에 태어난 그는 역사를 영속적 대결구도로 보았다. 동·서 문명의 대결이란 측면에서 그리스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을 바탕으로 서사시 문체의 ‘역사’란 저술을 남겼다. 헤로도토스는 평화든 전쟁이든 역사는 문명의 교류에서 이뤄진다는 확신을 가졌다.

역사학은 태생적 특성 때문에 대체로 보수성을 띤다. 그런데 20세기 초반부터 일부 진보 역사학자들이 기존 역사관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시대현상 분석의 대가인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이 그룹의 선구자다. 평생 공산주의 이념을 고수했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사진)도 반주류 역사학자였다.

이스라엘 건국한 시온주의엔 부정적
홉스봄은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서 태어났다. 홉스봄의 ‘봄’(보통 Baum으로 표기)은 독일, 동유럽 유대인에 많은 성이다. 아버지는 폴란드계, 어머니는 오스트리아계다. 빈과 베를린에서 성장한 홉스봄은 지적 호기심이 많아 강한 학구열을 보였다.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자 그와 그의 가족은 33년 런던으로 이주했다. 중학생 때 부모를 모두 여읜 홉스봄은 친척집에서 자랐다. 명문 케임브리지대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대학 비밀서클인 ‘케임브리지 사도회(Cambridge Apostles)’에 가입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류 사회에 낀 것이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도 ‘사도회’ 회원 출신이다. 홉스봄은 이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페이비언 협회와 페이비언들’이다. 페이비언 협회는 경제학자 존 케인스도 회원으로 있던 온건 사회주의자 단체다. 이들의 주도로 1900년 영국 노동당이 창당됐다.

홉스봄은 31년 중학생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독일공산주의 학생연맹에 가입했다. 36년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역사가 그룹에서 활동했다. 모리스 돕(노동사), 크리스토퍼 힐(사회사), 로드니 힐튼(문화사) 등이 그의 동료였다.

마르크스주의자란 이유로 제도권 학계에서 배척당한 홉스봄은 오랫동안 런던 버크벡 칼리지의 강사로 근무했다. 70년이 돼서야 전임 교수직을 얻었다. 이후 이 대학 총장을 지내다 82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다 지난 10월 1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가디언지는 그에게 “역사학자 중 역사학자”란 찬사를 담은 조의를 표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홉스봄의 ‘시대(The Age)’ 시리즈 4부작은 그의 대표적 저술이다.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75), ‘제국의 시대’(87), ‘극단의 시대’(94)다. ‘역사론’(97), 그리고 자서전 격인 ‘미완의 시대’(2002)와 함께 ‘폭력의 시대’(2007),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2011)도 많이 알려졌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18세기 중엽~19세기에 있었던 산업혁명을 유럽 근대화를 촉진시킨 정치·경제 이중혁명(Dual Revolution)으로 규정했다. 양대 혁명 모두 하층계급으로부터의 체제타파운동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을 대신해 주류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것으로 규정했다.

홉스봄은 20세기 전반부인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파국의 시대로 보았고 그 이후를 황금의 시대로 규정했다. 다만 전후 정의와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구현한다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미국의 신제국주의를 경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역사의 시각을 지배층이 아닌 하층계급의 생활 경험과 투쟁 의식을 기초로 재조명했다. 또한 종래 역사학이 정치권력 중심의 연구에 치중된 것을 탈피해 경제, 종교, 문화 등 인간 생활과 밀접한 분야를 모두 다뤘다. 역사의 전통적 기초가 상층부의 체제존속을 위한 각종 행위에 집중된 것을 수정해 이에 저항하는 내재적 긴장 상태와 사회 갈등을 집중 부각시켰다. 홉스봄은 54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판했지만 많은 동료학자들과 달리 공산당을 탈당하진 않았다. 세속적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의 건국 이념인 시온주의에 대해선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방대한 자료 심층분석으로 역사 해석
홉스봄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혹자는 그를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그가 지성을 공산주의 선전에 사용한 역사학계의 해독이었다고 혹평한다. 다만 그가 평생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자료의 심층 분석을 통해 가급적 중립적 입장에서 역사를 들여다본 인물이란 점에 대해서는 다수가 동의한다.

홉스봄은 좌파 지식인의 사상 전향을 가장 경멸했다. 환경의 변화나 실용주의란 구실을 대지만 실은 사익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원래의 이념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어 변절한 부류로 보았다. 격렬 극좌파에서 극우주의자로 변신한다면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현으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평생 지녔던 홉스봄에겐 이념과 사상의 전향은 한낱 자신에 대한 배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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