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스테이지] 소품 디자이너 김성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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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33) 씨는 연극.무용의 소품(小品) 디자이너다. '알토' 라는 자신의 스튜디오도 갖고 있다. 직원은 김씨와 자신을 따르며 일을 배우는 후배 다섯 명이 전부다.

이 정도면 먹고 살만 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사장(외부 직함은 실장) 이 당최 돈에 욕심이 없어, 알토는 벌어서 족족 쓰는 연구 모임이라는 편이 오히려 맞다. 그의 '변명' 이다.

"회사를 차려 독립한 지 2년이 됐는데, 한동안은 불안했다. 빨리 자리 잡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많은 사람들을 사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게 다 재산이 되지 않겠는가. "

김씨는 6년 전 극단 미추에 입단하면서부터 소품을 배웠다. 애초엔 분장 스태프로 들어왔는데, 손재주가 워낙 좋아 대표(손진책) 의 눈에 띄었다. "너, 소품을 한번 해보지. " 손대표의 한마디가 운명을 결정했다.

"전공(신구대 산업디자인) 과도 관련이 있고 재미도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승낙했다. 처음엔 보조자로 출발했지만 재미가 붙어 소품도 하고 분장도 하는 전전후가 됐다. "

김씨의 데뷔작은 96년 '오장군의 발톱' (국립극장 소극장) . 공연을 앞두고 '지전(紙錢.종이를 돈 모양으로 오려 만든 것으로 주로 망자의례에 쓰인다) ' 이 필요했다. 막막했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당시 국립극장 소품 디자이너이던 이상익(59) 씨. 지금은 은퇴한 이씨는 디자인 개념이 없던 옛날부터 몸으로 부딪혀 일을 터득한 장인(匠人) 으로 업계의 전설적 인물.

그는 "대뜸 '이런 것도 모르냐' 며 꾸중했다. 민속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질타였다. 일장 연설을 하더니 만드는 요령과 쓰임새 등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

이 때의 인연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됐다. 독립(99년) 할 때까지 미추의 연극을 도맡아 하면서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소품을 만들어 낸 것도 그때 이씨의 충고 덕분이다. 유명한 '미추 마당놀이' 와 토속적 리얼리즘극의 진수인 '춘궁기' 등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품은 말 그대로 자질구레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없다면 공연이 얼마나 윤기가 없겠는가. 정밀한 리얼리즘 무대는 말할 나위가 없다. "

소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김씨의 말에는 힘이 넘친다. 그러나 막상 전체 작품 속에서 소품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그의 관점은 겸손하기 이를데 없다.

"공연이 끝난 뒤 누가 '이런 소품이 돋보이더라' 고 말했다면, 그 작품은 실패한 것이다. 음지에서 전체적인 하모니를 돕는 감초 역할을 하는 게 소품 디자이너의 몫이다. "

소품 디자이너는 작품 제작 전과정에 참여해 연출자 등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해야 제대로 영역을 확보하고 일할 수 있다.

"우선 대본을 보고 소품 리스트를 뽑는다. 그리고 나서 연출.조연출과 상의하고, 연습을 보며 배우과도 의견을 나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감을 살피고 조명 디자이너와 색감도 상의해야 한다. "

전통 한지와 나무를 활용한 소품을 즐겨 만드는 김씨지만 업계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특히 요즘 기계장치를 활용한 소품 제작이 보편화하면서 이를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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