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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조약체결의 이면사-②-이선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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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미 언급한대로 한·미 결연의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자진해서 담당하고 나서니 만큼 당시의 이나라 정부로서도 심상하게 대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대일외교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전국유림의 계속 반대와 규탄을 받으면서 쩔쩔매게 된 것이 척족정권이었는지라 그들은 정녕『말은 가자하고 임은 붙잡으니 어찌할까』라는 곤경을 느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에 고심 궁리한 나머지 생각해낸 묘안이 우선 궁정중심의 비밀외교였다고 할까. 국왕과 그 측근의 몇몇 총신만이 알도록 하고 대국의 위엄을 빌어 대미교섭만은 그래도 추진키로 하되 그 내용을 일체 비밀에 붙이기로 작정하였다.
이같이 하고 신사년(서기1881년)6월에 당상역관 이응준을 북경경유 천진에 파견하여 이홍장의 막료인 정조여로부터 한·미 교섭을 위해 미사「슈펠트」와 협상할 수 있는 대관을 보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약의 초안까지 받아 가지고 귀국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소수의 관계자 밖에는 전연 알리지도 않았다. 나아가 북양아문의 저러한 요청을 아주 회피 할 수 없어 협상의 임시 실무대표격으로「대관」아닌「소관」을 파견하는데 이미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중인 교리 어윤중정도의 인물로하여금 이해 8월에 상해경유 슬그머니 천진의 북양아문까지 방문하고 돌아오게 하였으니 뉘라서 짐작인들 할것 이냐. 후일의 진짜로 예비교섭을 담당했던 김윤식의 수기「음청사」를 빌어보면 이 당시의 어윤중은 천진에서 이홍장 및 주복등과 더불어 그들이 보내왔던 조약초안중의「속방 운운」하는 문구까지 상의 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어윤중 자신의 수기「종정 연표」에는 그들과의 회견일자만을 표시해 두는 정도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어 비밀의 엄수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윤식·이홍장 여섯차례나 회담|임오년 2월말까지 교섭에 매듭>
그러했기에 실상인 즉 어윤중의 귀국과 전후하여 이조참의 김윤식정도를 그의 대신 파견키로 작정하고 발령함에 있어서도 한·미 교섭운운은 극비에 붙여 버린채 때마침 파견키로 결정한 청국유학생의「영선사」라는 직함만을 부여했던 것이라 애당초 미사「슈펠트」제독을 정식으로 상대할 수 있는 교섭대표 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9윌26일 서울을 출발한 영선사 김윤식이 육로로 천리길을 행진하여 압록강을 건너게된 것은 10월 25일이었고 천진을 들러 보정부의 직례총제부에서 이홍장과 첫 회견을 갖게된 것은 11월28일의 일이기도 하였다.

<중요 내용과 미「슈펠트」의 고심|청국 야심 드러낸 문구…「필수 상조」>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때부터 다음해 임오년 2월말일경까지 김윤식은 전후 6차에 걸쳐 이홍장과 그의 막료, 주복등으로 더불어 한·미 조약의 예비교섭을 거의 끝내게 된 것이 사실이었으며, 어느 모로나 기현상이 아니더냐. 김윤식은 정녕 미사「슈펠트」와 직접 협상절충해 본적이 없고, 따라서 대면조차 못해 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만큼「슈펠트」제독이가진 미국안과 이홍장이 준비한 북양아문의 초안 및 주일청국 공사관원 황준헌의 초안과 이나라 개화승 이동인이 기안해 보낸 조선국정부안등 네가지의 한·미 조약초안을 끝까지 손질하여 중매역인 청국측의 거중농간도 견제하고 그 시절에 있어 조선국이 체결한 그 어느나라 상대의 조약보다도 보다나은 조약을 작성할 수 있었음은 결국 미사「슈펠트」가 고심, 수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조인만를 기다리게 된 한·미 조약의 중요내용을 들추어 보기로 하자.
당년의 한·미 조약은 누구나 짐작하는 대로 전문 14개조항으로 작성되었다. 여기에 남달리 중요한 항목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그 제1조에 만약 타국이 체약한 그 어느 일방국가에 대해서나『불공경모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일경조지에 필수 상조하며 종중 선위 조처한다』는 문구가 기입된바 이 중에서도「필수상조」의 네글자는 그 삽입된 경위로 보나 후일에 문제된 점으로보나 매우 중요하다. 다름 아니요 중매역인 청국의 야심은 이 제l조에 조선국이 저희 속방이라는 문구를 삽입코자 기도했다가 미사「슈펠트」제독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별도로 조선국정부의 일방적인 태도표명에 맡기도록 한다음 그대신 이「필수상조」의 네글자가 들어 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필수상조」가 영문으로는「Good offices」- 알선정도로 되어 후일(1905년)의 노·일 청화회담때 한국정부가 일제의 주권침해를 미리 저지코자 미국에「필수상조」키를 요청했다가「디도·루스벨트」의 행정부로부터 보기 좋게 일축당한 일도 생기게 되었으니 어느 모로나 중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구가 한·미 조약과 거의 동시에 체결된 한·영 조약, 한·독 조약에도 그대로 삽입되었다가 비준서를 교환할 때 영·독 양국이 간과할 수는 없다.

<무역 조약에 미의 관대성을 표현|문화 교류에도 친절한 태도 보여>

<둘째>제5조의 관세문제에 있어 미국측이 우리나라의 관세자주권을 거부한 그 점에 있어서는 앞서 일제와 체결한 병자수호조약에 비하여 큰 차이도 없는 듯 싶다. 그러나 본 조문에 외국산물의 수입세액을 종가 30%까지 받을 수 있도록 인정하고 내국물산의 수출세액을 종가 5%정도라도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통틀어 노랑 돈한푼 아니 물기로 했던 일제와의 무역규칙보다 미국이 훨씬 관대했음을 의미한다. 이 한·미 조약이 체결된 후에야 일제측도 비로소 저정도의 관세를 물기로 하였으니 다시 일러 무엇할 것이냐.

<세째>치외치권 문제이니 제4조의 규정을 보면 원칙에 있어 일제와의 그것이나 다름없이 우리나라로 보아 편무적인 불평등 조약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별행으로 후일에 만약 조선국의 법률과 재판제도가 개량된다면 미국이 자진해서 그 치외법권을 철회한 다음 이 나라의 법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기도 서슴지 않았으니 비록 조속한 실현성은 없었다 해도 타국과의 조약에 비해 심리상의 아량만이라도 보여준 것이 사실이었다.

<네째>제11조에서는 특히『양국의 생도가 왕래하여 언어·문자와 법률·기예등을 학습할 경우 피차간에 균등히 협조함으로써 우의돈목을 도모한다』고 규정하여 문화교류를 위한 친절한 태도와 성의도 표시해 두었다.
따라서 이상을 종합해 볼때 그 당시의 이 나라가 마지못해 비밀히 파견했던 국제외교의 풋내기 삼품관(참의) 김윤식이나, 오품관(교리) 어윤중등이 주복같은 이홍장의 막료급 인물에 주로 매달려 간접적이면서도 훨씬 저자세의 교섭절충이나 담당했던 그 수고보다도 미사 「슈펠트」의 이홍장을 상대한 교섭절충이 몇배 더 효과가 있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그는 정녕, 선량한 중매역인체「이이제이」하며「종방」의 위세나 부려보자던 이홍장의 야망도 능히 견제하고 일제와 노제의 시기방해도 배제하면서 저정도의 한·미 조약이나마 조인단계로 이끌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 지극히 음험했던 극동외교의 실태에 비추어 미국대표「슈펠트」제독이 보여준 태도와 성의는 실로 그의 조국을 위하여 좀더 훌륭한 근대국가다운 체모를 발휘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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