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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점에 도달한 「수카르노」체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아직 사태는 유동적이나 「운퉁」중령이 기획한 「인도네시아」의 「쿠데타」는 일단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인적구성으로 보아 친공적인 성격이었을 것이라는 이번 「쿠데타」기도는 「나수티온」국방상 겸 3군 참모총장의 즉각적인 역「쿠데타」에 부딪쳐 일단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2일 새벽 현재 한때 혁명위까지 조직하였던 「쿠데타」군은 수도에서 물러나 중부「자바」로 패주해 간 것 같다.
이로써 급박한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불안은 우선 한 고비를 넘긴 듯 하다.그러나 비길 데 없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믿어졌던 「수카르노」체제는 이번의 정면도전으로 심하게 요동될 것이 확실하다. 말하자면 「수카르노」 체제의 심층에 잠재해 있던 불안의 요인들이 이제는 거의 수습키 어려운 포화점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1949년, 「헤이그」협정으로 3백50년간에 걸쳤던 화란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그 때로 부터 오늘까지 「인도네시아」정국은 줄곧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 유지되어온 것이 사실이었다. 대소 1만3천을 헤아리는 군도적 국토구성에서 오는 지역적 이해대립과 민족자본 및 산업의 극도의 후진성, 복합적 사회구조에서 오는 계층적 이해상충이라는 난제를 안고 「인도네시아」의 고민은 그 독립의 첫날부터 심각한 것이 있었다. 더우기나 대항적인 정치세력인 군부와 공산당이 비대화함에 따라 제기된 여러 문제들은 그러한 고민에 일층 박차를 가하였다. 그래서 비교적 우호적인 군부의 온건과 상반되는 공산당의 과격, 즉 두 이질적 요소의 안배를 위해 「수카르노」는 1957년 초, 「수마트라」 군부 반란와중에 마침내 사회주의를 건설하되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인도네시아」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이른바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에 대한 신앙.민족주의.국제주의.민주주의.사회정의를 「인도네시아」와 「수카르노」혁명의 5원칙으로 삼게 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56년에서 57년에 걸쳐 「자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이 분규의 소용돌잇 속에 매몰 되었었다는 것과 위의 국토적 조건에서 온 고민의 반사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불안의 씨는 이미 항존 해 있었거니와, 그 속에서나마 「수카르노」체제가 평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1927년 이래의 조국독립 투쟁을 통해 국민적 영웅이 되다시피 한 「수카르노」개인의 확고한 「퍼스널.리더쉽」이 자리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미루어 보아 「수카르노」의 압도적인 지배력에도 이제는 금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좌우의 길항을 용하게 조정, 주름잡아오던 「수카르노」의 지도력은 퇴색하기 시작하였음을 이번 사태는 웅변히 말하여 준다.
「인도네시아」의 국내적 위기는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어려운 고비에 들어설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수카르노」개인을 둘러싼 사생활의 난맥, 부패의 악취 같은 것이 그러한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같으며, 화란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제일산업인 「고무」산업의 극도의 부진 등으로 그의 성예는 또 다른 한편에서 몹시 추락하고 있는 것 같다.
대내적 고민을 밖을 향해 배설시키느라고 때때로 남태평양에 바람을 일으켜왔던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는 이제 중대한 정치적 기로에 섰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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