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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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서구에서 만화가 예술로 인정받은 지는 오래다. 영화.TV에 이어 '제9의 예술' 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부여받았다.

프랑스에는 "만화가 먼저 원심운동을 하면 철학이 나중에 그것을 중심으로 추스른다" 라는 말도 있다. 칸과 칸 사이에 숨어있는 상상력의 뾰족한 침이 정치.종교.철학.문학 등 제도의 바깥 언저리를 쉴 새 없이 간지럽히며 자극하고 상호작용한다는 뜻일게다.

성완경 인하대 교수의 『세계만화탐사』는 이렇듯 '유연하고 심오한' 만화의 바다를 항해하는 데 꼭 필요한 나침반이다. 이 책의 출간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여전히 '아동용' 으로만 폄하되며 '돈 되는 물건' 정도로나 치부하는 만화를 대중문화의 한 영역이자 자료 수집과 연구.비평의 대상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잡지 시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국내 만화출판계의 편향을 바로잡는 것이다. 일본 만화가 별로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 만화 외의 다른 만화가 소개될 수 있는 경로를 원천봉쇄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물론 미국.유럽.중남미 등에만 연신 애정 표현을 하는 저자에 대해 '또다른 엘리트주의' 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류에 영합한 화제작만을 추려 인상 비평하는 식으로 꾸민 기존의 만화비평서들과 견주어볼 때 훨씬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서론이 장황했다. 이런 '어깨에 힘들어간' 얘기가 시들하다면 부제처럼 "세계 만화의 23개 보물섬을 찾아가는" 기분으로 부담없이 책장을 넘겨도 된다. 우선 보물섬을 찾아가기 전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그림으로 보는 세계 만화사' 다.

3만년 전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만화의 누벨바그' 를 주도한 에드몽 보두앵의 『여행』(1996년) 까지 만화사적으로 의미있는 잡지의 창간이나 작품 발표 등이 화보와 짤막한 설명과 함께 정리됐다.

탐사의 시작은 1896년 탄생한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의 『옐로 키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과 말이 결합된 이야기 형식의 만화의 효시' 다. 이 노란 잠옷을 입은 개구쟁이 꼬마를 서로 끌어오기 위해 조셉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라는 두 언론 재벌이 혈전을 벌인 사건은 유명하다. '옐로 저널리즘' 이라는 말도 이 때문에 생겼다.

캐릭터 산업에서 가장 총애받는 동물 캐릭터인 개.고양이.쥐가 쓰인 것은 '톰과 제리' 가 처음이 아니다. 1910년 발표해 작가인 조지 해리먼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35년간 연재한 『크레이지 캣』이다. 저자는 이 만화를 '시(詩) 적인 향기가 풍긴다' 고 설명한다. 클레나 미로를 연상시키는 축약된 드로잉의 맛 때문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만화 『아스테릭스』도 빠질 수 없다. 일본어.바스크어.라틴어 등 세계 40개국 언어로 번역돼 수출에서도 효자 노릇을 한 작품이다. 프랑스인들의 기질과 유머 감각을 가장 잘 반영해 8편이 출간된 후인 66년에는 주간지 렉스프레스가 '아스테릭스 현상' 을 커버 스토리로 보도하기도 했다.

얼마 전 국내에도 출간된 『체 게바라』(현실문화연구) 의 저자 알베르토 브레시아의 작품은 남미 정치 현실을 읽는 교재로도 가치가 있다. 현실과 은유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 군부 독재 말기의 작품 『뻬라무스』는 다큐멘터리를 빼닮은 흑백의 그림체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밖에도 SF와 정치를 결합시킨 팬터지물 『니코폴』의 엔키 빌랄, 페미니즘 만화 『욕구불만자들』로 '만화의 우디 앨런' 이라 불리는 브레테셰, 블랙 유머를 통해 추(醜) 함의 미학을 구사하는 『빨간 귀』의 레제르, '20세기 모험만화의 고전' 으로 추앙받는 『땡땡』의 에르제 등 그간 단편적으로 소개됐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비중있는 작가들을 세계만화사의 맥을 짚어가는 가운데 열거하고 있다.

만화의 표지뿐 아니라 주요 장면들을 대부분 컬러 도판으로 실었고, 각 장의 말미에는 작가 약력을 덧붙이는 등 '참고서' 로서의 편집에 충실했다. 기본적 뼈대는 하늘연못에서 98년에 펴낸 『제9의 예술 만화』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훨씬 대중적이다.

*** 성완경 교수는…

성완경(57) 인하대 교수의 주 무대는 미술계다. 서울대 미대와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 미술 쪽에서는 단연 손꼽는 대표 주자다. 88년 뉴욕에서 열린 '한국의 새로운 문화운동-민중미술전' 을 기획해 '민중미술' 이라는 고유명사를 해외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성교수는 현재 2002년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영상문화학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아내 박신의 경희대 교수도 미술 평론가로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다.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우리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고문 등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 성교수의 남다른 '만화 사랑' 은 유명하다. 특히 유럽 만화에 대한 연구는 독보적이다. 해마다 프랑스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을 빼먹지 않고 관람하는 등 쉼없이 공부하는 자세 덕분이다.

학자지만 고루한 편견에 매몰되지 않은 열린 태도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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