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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의 동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불란서에서 온 선물-. 이렇게 말하면, 금시「샤넬」향수나, 불란서인형이나, 혹은「디오르」의 양장점에서 재단한 멋진 야회복이 아닐까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는 여인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한층 더 값진 선물은 바로 근대시민의「자유」라는 것이었다. 남보다 일찍 시민혁명을 치렀던 불란서국민들은 여러 나라에 참신한 자유정신의 기풍을 불어넣었다. 그중 하나의 선물이 직접 우리가 눈으로 구경할 수 있는「뉴요크」항구의「자유의 여신상」이다.
인지 하나가 2「미터」45「센티」나되고 그 굵기가 1「미터」44「센티」나 되는 이 거대한 여신상은, 그 당시 기술적으로도 불란서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조차 못내는 일이었다.「에펠」탑을 세운「바람의 정복자」,「에펠」씨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해골공사였다.
그러나「불란서의 선물」가운데는 그와 또 정반대의 것이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테러」가 바로 그것이다.「테러」란 말의 배후를 수사해보면 공포를 뜻하는 불란서 말「테레르」가 나타난다. 즉「테러」는 불란서혁명 때의 그 공포정치가 남긴 선물이다. 그러고 보면「자유」와「테러」는 상극하는 것이면서도 그 본적지는 이렇게 다 같은 불란서이며 다 같은 혁명시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어떠한가? 「테러」의 역사와 자유의 역사는 다 같은 연륜 20년-그러나 자유를 향해「샴페인」을 터뜨린 기억보다는「테러」에 몸부림친 악몽이 한층 더 생생한 것 같다. 정치가 격돌할 때마다「자유」는 기절하고「테러」는「트로피」를 받은 셈이다.「고하」암살에서 땃벌떼에 이르기까지,「테러」범의 처리나 그 배후조사는 으례 서일필, 역사의「스코어·보드」엔 주먹의 승리가 기록되어가고 있다.
이번에도 또 그럴 것인가?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관계장관의 사표는 반려되고,「테러」범은「내 주먹을 사라」고 어디선가 호걸풍으로 웃고 있는 것 같다. 정부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우리의 구원한 자유의 앞날을 위해서도, 이번 기회에「테러」의 생리를 「뿌리뽑지」않으면 안될 것 같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인천항구쯤에 무시무시한「주먹의 동상」이 세워질는지 누가 아는가? 분발하라. 어느쪽 선물을 택할 것인가.「자유의 여신상」이냐? 「주먹의 테러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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