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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권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울대학교의 학칙 제1조는 대학의 목적을 「학술연구」와 「지도자적 인격형성」에 두어, 이 두 가지 목적달성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자유」의 개념을 대학의 본질로 삼고 있다.
대학의 자주성은 대학의 생명이요, 대학의 생명은 민족과 더불어 영구적이기 때문에, 또 내일의 동량재를 양성하는 곳에 자주성이 있어야만 민족과 국가의 자주성이 연장되고 새로운 문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문명국가는 대학을 존중하고 북돋워주고 있다.
서구의 선진국가에서는 대학을「국가 안의 국가」라고 일컫기도 한다.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가 그 좋은 예. 이들 두 대학은 1년 예산의 70%가 국가보조이지만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교수가 교단에서 무신론적인 주장을 하다가 말썽이 되어도 그 사회의 비판을 받을 뿐, 국가는 간섭하지 않는다.
확실히 대학은 국가 이전의 존재이다.
때문에 일시적인 정권이 자기의 목적달성을 위해 대학을 이용하거나 간여할 수는 없다.
정부는 망해도 대학은 망하지 않으며, 국가가 없어도 대학은 존재한다.
국가 이전에 사회가 있고 그 사회와 더불어 자라가는 것이 대학이기 때문에….
「파리」대학은 11세기 말 불란서가 통일을 하지 않았을 때도 국가의 대들보를 양성해냈고 일제지배하의 우리민족 역시 나라는 없어도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보전·연전 등의 학원은 건재했다.
1806년「나폴레옹」이 구라파 정복의 길에 독일 「예나」대학에 들렀다가 이 대학이 독일 민족주의의 소굴임을 발견, 불을 지르려다가 그도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는 고사도 있다.
이와 같이 학원은, 아니 대학은 국가 이전의 역사, 국가 이전의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관권이나 총칼로 강제하지 못하여, 완전한 자유와 자주, 독립, 자치 밑에서 그들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곳이다.
여기서의 자유란 결코 무 법칙이나 무 구속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좀더 고차적인 질서 위에서 그때 그때의 집권자의 치적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비전」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대학자유의 특색은 대체로 두 가지. 첫째는 대학이 행정적으로 완전히 자치단체이고 교수나 강사의 임명을 비롯하여 대학의 모든 운영은 교수회가 도맡아 한다.
둘째로는 대학의 자유 속에 「학습의 자유」와 「교수의 자유」가 모함되어 학생은 일단 학원에 들어가면 어느 계통의 서적을 가지고 공부하든지 완전히 자유이며 교수 역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학문연구에 대해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외서 수입에 대해서까지 간섭이 뒤따르고 학생들의 연구단체가 권력에 의해서 해체되며 또한 지도교수가 「정치교수」로 몰려 밀려나야 할 판이다.
공산주의국가에서 자본주의를 깊이 연구하는 등의 사실 등에 관해서 우리나라의 대학은 좀더 생각해야 하며 과감한 연구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 군정2년 동안에는 대학교수들이 자문위원, 기획위원, 전문위원, 고문 등의 이름으로 정치에 대거 참여했지만 그것은 연구결과의 실현이었기보다는 치자가 세운 테두리 안에서 그 이론적 뒷받침이나 해주는 어용화로 타락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혁명정부 실책의 책임이 교수에 있다는 말을 듣지만 학자개인의 공과는 따로 따져보더라도 대학의 연구기관으로서의 존엄성이 해쳐졌다는 비난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교수의 생리와 정치의 생리에는 근본적으로 간격이 있어야하며 그것이 또한 대학의 사명이다.
이상과 비판에 사는 교수가 현실과의 타협 또는 투쟁인 정치생리에 맞을 리가 없다.
혁명정부의 화폐개혁, 농촌고리채 정리등 중대한 정치적 실책은 결국 정치생리에 미숙한 교수들의「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공인되고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교수가 연구에 전념하지 않고 도리어 현실정치의 자료제공 또는 이론체계화 요원으로 동원된 사실은 타의 건 자의 건간에 후일 반드시 역사가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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