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금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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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업정지된 진흥저축은행 앞에서 26일 만난 이선원(77) 할머니는 “안전하다고 해서 투자했는데 막막하다”며 “금융회사들이 노인네를 도와주기는커녕 이용만 한 셈”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씨가 서울 북창동 진흥저축은행 출입문을 나서고 있다. [강정현 기자]

최근 영업정지된 진흥저축은행 앞에서 만난 이선원(77·여·서울 이문동)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버는 게 없는데 은행 이자가 쥐꼬리만 하니 살기가 어렵잖아. (이자를) 조금만 더 얹어 준다고 하면 혹할 수밖에…. 뭔지 몰라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후순위채니 뭐니 하는 것에 노인들이 투자하는 건 다 이런 이유야. 저축은행 피해자가 다 노인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네들 도와주기는커녕 ‘안전하다, 안전하다’ 꼬드겨서 자기네들 빈 깡통 채운 거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씨는 ‘무식하고 못 배운 노인’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이화여대 기악과)을 졸업한 엘리트다. 그런 이씨지만 저축은행 후순위채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 2억원을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봤다. 주변에선 “몇 푼 더 벌려다 탈이 났다”며 수군댔다. 투자는 원칙적으로 투자자 책임이다. 그 점에선 이득을 보든 손실이 나든 이씨 책임이다. 하지만 이씨만의 잘못이라기엔 너무 가혹하다. 채완기 ING생명 재무설계사는 “요즘 금융상품의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며 “고령층은 물론 전문가들도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별도의 금융교육 등 고령자 보호를 위한 금융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며 “이씨의 경우도 금융회사가 위험을 제대로 알려 줬으면 손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우리 사회의 금융인프라는 고령화사회를 대비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은 2000년에 이미 65세 이상 인구가 7% 이상인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이미 늙은 사회지만 늙어가는 속도는 더 빠르다. 14년 뒤인 2026년이면 초고령사회(고령자 20% 이상)에 진입한다. 그런데도 늘어가는 고령층 투자에 적합한 금융서비스나 금융상품을 찾기 어렵다. 고령층을 위한 전용 금융강좌를 개설한 곳은 신한금융지주 한 곳뿐이다.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인 금융감독원에도 별도의 프로그램이 전무하다.

 그러는 사이 고령층의 금융 투자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초저금리로 마땅히 돈 굴릴 곳이 없어진 게 큰 이유다. 우리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형수 소장은 “초저금리 시대가 이어지면서 모아 놓은 돈을 굴려 생활하는 고령층의 고수익 상품 투자도 늘고 있다”며 “그러나 고수익 상품일수록 구조가 복잡하고 손실 위험이 커 고령층 투자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평생 예금만 하던 고령자가 은행 창구 직원 권유로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기 일쑤다.

금감원의 최근 조사 결과 금융회사들은 65세 이상 고령층에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상품을 4조원어치 넘게 팔았다.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1년 새 판 금액(24조4656억원)의 17.1%다. 2009년 금융감독 당국은 65세 이상 고객에겐 파생상품 판매를 크게 제한했지만 소용없었다.

 원금 손실 등에 따른 분쟁도 늘고 있다. 한국거래소의 금융분쟁 집계 결과 고령층에 금융분쟁이 몰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분쟁 중 특히 ‘증권사의 부당 투자 권유에 따른 손해’로 인한 분쟁 비중이 노령층은 80%로 전 연령대 평균(37%)보다 크게 높았다. 중앙일보·한국리서치 설문조사 결과 164명의 60세 이상 투자자 중 원금 손실 경험이 있는 이는 63%(103명)에 달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고령층의 위험 투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거래소는 60대 이상 고령층의 주식 소유 비중이 지난해 33%에서 2030년엔 53%로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봤다. 김인선 KDB대우증권 마포지점 PB는 “고령자들 대부분이 은행 창구에서 파는 상품은 무조건 원금 보장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라며 “노인 전용 투자 창구 개설 등 ‘노인을 위한 금융’ 시스템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안혜리·김수연·위문희 기자

◆ELS=주가 흐름과 연계해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높은 수익을 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이다. 이런 상품 중 예금은 주가연계예금(ELD), 펀드는 주가연계펀드(ELF)로 구분해 부른다.

◆후순위채권=발행한 기업이 부도났을 때 다른 채권자에 비해 변제의 우선순위가 밀리는 채권이다. 떼일 위험이 높기 때문에 선순위채권보다 높은 금리를 준다. 지난 몇 년간 사정이 어려운 저축은행이 많이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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