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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선구 배만실 박사, 정부청사·호텔 실내 디자인 도맡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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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배만실 전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 교수가 19일 경기도 판교 자택에서 물레를 앞에 두고 웃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61년 워커힐 호텔 관광센터, 69년 조선호텔, 70년 정부종합청사 , 71년 중앙청 국무회의실, 76년 대연각 호텔, 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80년 남산 서울타워….

 당시 이 건물들의 실내 디자인은 한 사람의 손을 거쳤다.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계의 원로 배만실(89) 박사. 이화여대에 장식미술학과를 창설(1967)한 주역이다. 최근 발간된 ‘춘빈 배만실 박사 작품집 2012’를 들고 경기도 판교 그의 집으로 갔다. 거실 창가에 그득한 화초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디자인도 그랬다. 가령 정부종합청사 특별식당은 테이블 사이를 화초로 나눴다. 70년대엔 생소하던 ‘실내 조경’ 개념이다. “실내 디자인을 맡을 때마다 가구만 들여놓는 것은 삭막하다고, 조경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죠.”

 그는 독립운동가인 조부를 따라 북간도 용정서 자랐다. 1940년 당시 이화여전 영문과 입학 후 경성제대 병원의 외과의사와 결혼해 2남2녀를 낳았다. 남편은 혈관 질환으로 병약했다. 남은 날이 얼마 없음을 직감했는지 “내가 죽은 뒤에도 아이들을 건사하고 결혼도 시켜야 하지 않겠나. 혼자서도 이 가정을 이끌 어머니가 되어 주면 내가 아주 편안하겠다”고 되뇌었다. 젊은 아내가 미국 국무성 원조 유학을 떠나도록 독려한 것도 남편이었다.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산업미술을 배웠다. 네 아이를 서울에 두고 유학온 한국의 부인이라 해서 현지 언론도 주목했다. 기사를 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전 대통령 부인인 엘리너(1884~1962)가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한국에 전쟁 미망인들이 많지 않은가. 여기서 배운 것을 그곳에서 보람있게 쓰면 좋겠다”고 유학생을 독려했다.

귀국해 61년 이화여대 생활미술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가 전성기로 꼽는 시기. “새로운 공부를 하고 돌아와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였죠. 이성순 소마미술관장, 조정현 이화여대 도예과 교수 등이 그때 제자들이에요.”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남편과 사별(1965)했다. 88년까지 27년간 이화여대 교수로 가르쳤고, 정년 퇴임 후 91∼97년까진 춘빈토탈디자인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를 물었다. “6·25때죠. 그러나 저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쟁 미망인들이죠.” 지붕없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마산으로, 부산으로 피난했다. 서울로 돌아와 53년부터 양재학원에서 직접 그린 교재로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을 가르쳤다. 이들에게 양재 기술은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69년 신축한 조선호텔의 내부 디자인을 맡았다. 입구부터 한국적 전통을 강조했다. 전통의 현대화는 당시 시각예술계의 화두였다. 스스로 꼽는 대표작은 호텔 카페 ‘인형의 집’. 기와 지붕을 인 벽면, 벽 속 진열장엔 한복 입고 전통 의례를 재현하는 인형들을 넣었다. 『한국 목가구의 전통양식』(1988) 등 조선시대 가구에 대한 책도 여러 권 냈다.

 김수근·김희춘·엄덕문·이희태 등 당대 건축가들과 협업했다. 그들은 건물을 지으면 인테리어를 부탁했다. 이제 세상에 없는 이들이다. 사람뿐 아니다. 정성들여 꾸민 건물들도 많이 없어졌다. 유행 지난 실내장식은 사진 자료로만 남아 있다. 구순(九旬), 귀도 잘 들리지 않고 거동도 불편하다. 그러나 녹색 한복을 입은 노부인은 장남(최상헌 중앙대 건축과 교수)이 엮어준 작품집을 들고 “행복했다”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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