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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유람선에서 탄생한 중국공산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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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차 당 대회를 기쁘게 환영하자(喜迎十八大)”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동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 대표대회(당 대회)가 끝났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를 중심으로 중국을 5년 또는 10년을 끌고 갈 새 지도부가 형성되었다. 전국의 공산당 대표들은 대회가 열렸던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을 뒤로 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91년 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될 때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 제1차 창당대회는 1921년 7월23일부터 장사(長沙)대표 마오쩌둥(毛澤東)등 전국대표 13명이 모여 상하이에서 비밀리 개최 되었다. 당시 중국의 공산당 당원은 전국에 통틀어 57명뿐이었다. 현재 전체 8200만 여명의 공산당원과 2200여명의 전국 대표와 비교할 때 격세지감이 있다.

대회 자체가 불법이었으므로 개최지는 비교적 안전한 프랑스 조계지에 있던 리한준(李漢俊) 상하이 대표 큰형의 개인집이었다. 석고문(石庫門) 건축 스타일의 붉은 벽돌집이 현재는 창당대회 유적지(一大會址)로 박물관이 되어 있다. 회의가 끝나기 하루 전인 7월30일 밤 프랑스 조계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았다. 국민당 밀정들이 공산당원의 불법집회를 밀고한 것이다. 신변의 불안을 느낀 대표들은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이 대표 리다(李達) 부인의 건의로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저장성(浙江省) 지아싱(嘉興)의 난후(南湖)로 회의장을 옮기기로 하였다. 리다 부인이 지아싱에서 여학교를 다녀 난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전국 대표들은 유람객으로 위장 지아싱의 난후로 모였다. 난후는 청대의 건륭황제가 남순(南巡)시 수차례나 방문하였던 호수 가운데 연우루(煙雨樓)가 있는 강남의 명소이다. 그들은 유람선(畵舫)을 빌려 선상에서 마지막회의를 하였다. 8월2일 오전 11시에 시작된 회의는 오후 6시에 무사히 폐회됨으로써 중국 공산당의 창당을 내외에 알릴 수 있었다.

첫 회의에 참석한 대표 중에 마오 주석과 함께 신 중국 건설에 큰 역할을 한 둥비우(董必武)는 1964년 지아싱의 난호를 다시 찾아 감개무량한 듯 “중국의 혁명은 유람선에서 탄생의 첫 울음을 들려주었네(革命聲傳畵舫中)”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자 대회는 그 후 상하이 광저우등에서 매년 개최되다가 1928년 6차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후 1945년 옌안(延安)의 7차 대회까지 17년간 장정(長征)과 내전(內戰)으로 당 대회가 없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5년에 한 번씩 개최된 것은 1977년 11차 당 대회부터였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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