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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라두 루푸 피아노 독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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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7일 첫 내한 공연을 연 라두 루푸. 2년 전에도 추진됐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됐다. [사진 마스트미디어]

17일 오후 7시. 루마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67·Radu Lupu)를 기다리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유난히 어두웠다. 극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주최 측은 “피아니스트의 요청이 있었다. 콘서트홀이 생긴 이후 가장 어두운 상태에서 여는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무대 준비에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한 루푸는 공연 전날 10분 만에 독주회에 쓸 피아노를 선택할 정도로 털털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유독 밝은 조명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루푸는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가장 어두운 조명으로 공연을 한다”며 콘서트홀 조명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한다.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가 터덜터덜 무대로 걸어 나왔다. 이날의 레퍼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슈베르트였다. 16개의 독일 춤곡으로 손가락을 푼 그는 슈베르트가 죽기 직전에 작곡한 4개의 즉흥곡을 연주했다. 특히 즉흥곡에서 절제의 연주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줬다. 감정이 고조된 부분에서도 가끔 머리를 좌우로 흔들 뿐, 신중하게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연주를 이어갔다.

 중간 휴식이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의 연주가 시작됐다. 30년 동안 언론 인터뷰를 거부한 채 음악의 심연(深淵)에 빠진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소리는 어두운 조명을 만나 하나가 됐다. 왼손이 멜로디를 연주하는 오른손 위를 날아 피아노 건반에 떨어지는 2악장에선 슈베르트가 음악에 새긴 가장 깊숙한 감정으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2악장 연주가 끝나자 객석 곳곳에선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15일 한국에 도착한 루푸가 주최 측에 요청한 것은 단 하나, ‘전자 키보드’였다. 피아노가 있는 홀로 찾아가서 연습하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달리 그는 연주 당일을 제외하곤 호텔에서 나가지 않았다. 루푸는 31살에 요절한 슈베르트가 남긴 조용한 작별의 인사를 들려주기 위해 호텔방에서도 연습을 이어간 것이다.

 루푸가 이날 연주한 작곡가 슈베르트는 평소 모차르트를 존경했고 그를 닮고 싶어했지만 작곡 스타일은 결코 모방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작곡을 하며 마지막 순간에 펜을 들어 악보에 옮겼던 모차르트와 달리 슈베르르는 항상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고민했다. “나의 음악은 내가 가진 재능과 고통(misery)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루푸는 그 고통의 깊이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푸의 공연은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이어진다. 그는 이날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이대욱)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을 협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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