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체험하며 별난 재미 만끽 패션과 내 작업은 한통속”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7호 14면

#가로·세로 4m, 높이 3m의 주황색 상자로 발을 들이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수천 개의 똑같은 디지털 코드로 채워진 사방의 벽.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벽면도 출렁거린다. 무늬가 커졌다 작아졌다 끊임없이 넘실댄다. 컴퓨터 전원, 0과 1의 2진법, USB 등 디지털을 모티브로 한 여덟 가지 무늬는 ‘보는 것’이 아닌 ‘경험하는 것’이다.

에르메스와 협업한 디지털 아티스트 미구엘 슈발리에

#실크 커버로 만든 열두 페이지의 책은 텅 비어 있다. 하지만 흰색의 지면 위로 손을 올리면 수백 개의 픽셀로 움직이는 가상의 활자가 떠오른다. 페이지를 넘기면 철학자 크리스튼 뷔스클뤽스만(Christine Buci-Gluksmann)의 은유적 텍스트와 중간중간 타이 묶는 법을 알려주는 동영상이 실려 있다.

두 설치작품의 전시 제목은 ‘8 크라바츠(8 Cravates) 컬렉션’. 그런데 볼수 있는 곳은 미술관이 아니다. 다름 아닌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의 에르메스 매장 안과 밖이다. 19일까지 누구나 관람 가능하다. 그런데 패션 브랜드가 거대한 작품까지 선보이게 된 사연은 대체 뭘까.

에르메스는 올가을·겨울 타이 컬렉션(H8)으로 8개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폭 8cm에 케이블 잭, 키보드 기호 같은 디지털 상징 8개를 패턴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디지털 아티스트 미구엘 슈발리에(Miguel Chevalier)와 협업을 꾀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슈발리에는 1978년부터 컴퓨터를 예술의 표현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상품 디자인이 아닌 새로운 컬렉션의 컨셉트를 디지털 아트로 구현해냈다. 회화·사진을 넘어 디지털 아트까지 패션과 조우하는 첫 시도였다.

13일 전시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슈발리에는 “타이·실크·책이라는 전통적 아이템과 디지털이라는 동시대의 감성을 접목시키는 시도가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또 “디지털 아트와 패션은 관객(소비자)의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성, 감상이 아닌 체험이 되는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의 작품세계와 협업 뒷얘기에 대해 물어봤다.

-어떻게 협업에 참여하게 됐나.
“2년 전 우연히 에르메스의 실크 컬렉션 총괄 디렉터를 만나게 됐다. 그때 나의 디지털 작업에 대해 설명했고, 얼마 안 돼 그가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그는 내가 20여 년 전부터 해온 작품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극비에 부쳤던’ 에르메스의 타이 프로젝트와 너무나 흡사하다면서 컬렉션에 협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작업 과정은 어땠나.
“원래 하던 것을 그대로 발전시켰을 뿐이다. 가령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은 기존 작품인 ‘바이너리 웨이브(2진법 파동)’가 시초가 됐다. ‘버추얼 북’ 역시 내 작업 ‘헤르바리우스 2059(Herbarius 2059)’에서 차용했다. 다만 벽면 프로젝션에선 ‘작곡가 야코보 바보니 쉴링지의 음악을 가미했다. 디지털 아트에 어울리는 전자음악, 마치 고전적인 전자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익숙한 배경음을 섞었다. 그리고 관객들이 무늬를 고르는 수단으로 아이패드를 이용했
다.”

-작품에서 보여주려는 메시지는.
“기존 작품들은 일방적인 전달이다. 하지만 나의 작품은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소통하며 완성된다. 보는 이의 움직임과 주변 상황에 따라 그 다음 시나리오가 생겨나고 또 발전하기 때문에 매 순간 다른 작품이 된다. 패션도 비슷하다. 입는 사람, 타이를 매는 사람이 어떻게 참여(스타일링)하느냐에 따라 분위기, 모습이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단편적이지 않은 여러 요소의 복합성이 나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디지털 아트의 매력이라면.
“동시대성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사고와 그 시대의 도구들과 함께 발전해 왔다. 60년대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소비주의로 인해 팝아트가 호평을 받지 않았나.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디지털 시대에 컴퓨터를 통한 소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백남준을 존경한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뉴욕 전시에서 세 번 정도 만난 인연을 털어놓으며 “내가 작가로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려준 분”이라고 했다. 당시 많은 이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비방했지만, 리모컨을 이용해 무자비하게 채널을 돌리며 넘쳐나는 매체 속의 우리 모습을 예견하고 읽어낸 것이 바로 백남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TV수상기를 몇 대씩 움직여야 하는 백남준보다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 자신이 훨씬 행복하다는 슈발리에. 하지만 디지털 아트에도 한계는 있지 않을까. “글쎄, 기술력으로 실현시키지 못한 작업은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비용 때문에 멈춘 작업은 있다! (웃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