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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중심사회] 과학계, 노무현 당선자 공약 점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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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5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행보가 빨라지면서 과학기술인들의 촉각 또한 인수위로 쏠리고 있다.

박기영(45.여) 순천대 기초과학부 교수가 25명의 인수위원 가운데 한명으로 선발돼 경제2분과에서 맹활약을 예고하는 등 과학기술 5년 정책의 '청사진 그리기'가 시작된 셈이다.

이에 본지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공약이 '공약(空約)'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 예상되는 문제점을 미리 짚어봤다. (편집자)

◇조직.인사=盧당선자의 공약 가운데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청와대에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의 신설이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수석비서관을 두면 과학기술계의 현안과 목소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랜 숙원이었다.

'국민의 정부'도 출범 이전 수석비서관 설치를 약속했지만 '작은 정부'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맞지 않아 끝내 무산됐다.

그러나 수석비서관 한명이 3~4개 부처를 관장하는 현 체제에서 과학기술 분야를 한명이 담당하도록 하는 것은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이다.

또 청와대 비서관 운영시스템을 부처별 관장 체제에서 기능 중심으로 재편하지 않으면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을 두더라도 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것이 행정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황용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과학기술 정책의 총체적인 조율을 위해서는 오히려 미국이 채용하고 있는 보좌관 제도를 십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盧당선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과학기술 분야의 예산배분권을 부여하는 등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정부 조직 내 진통이 예상된다.

국과위가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기획예산처의 예산배분권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만을 떼어준다면 국방이나 교육 등 다른 부처들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보다는 주로 1년 단위로 이뤄지는 과학기술 예산 편성 관행을 중.장기적으로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실행 가능성 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밖에 과학기술자 국회 비례대표를 늘리고 공직 진출 기회를 확대할 것을 약속한 데 대해 과학기술인들은 "무엇보다 대통령 의지의 문제"라며 지나친 기대는 자제하는 반응을 보였다.

◇연구개발 투자=지난해 정부의 연구개발(R&D) 투자는 4조9천5백56억원으로 전체 예산 가운데 4.7%를 차지한다. 盧당선자는 이보다 월등히 많은 7%를 내세웠다.

과학기술계는 이에 대해 "연구개발 투자 비율이 공약대로 올라간다면 대단한 발전이 뒤따르겠지만 관계부처와 부단한 협의를 거쳐야 하는 등 달성되기 힘들 것"이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무엇보다 '7%'라는 숫자에 집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국민의 정부'도 공약으로 내건 임기 내 5% 목표를 무리하게 달성하기 위해 정부 예산에 특별회계 등을 포함시켰다가 다시 삭제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민철구 STEPI 연구위원은 "이제 양보다 질의 문제를 따져야 할 때"라며 "건물 건축비나 시설비로 사용되는 예산을 빼고, 실질적으로 연구에 들어가는 비중을 높이는 데 신경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무래도 투자가 늘어날수록 결과에 대한 비난의 횟수가 정비례하는 만큼 자원배분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춰 목표치 관리가 합리적이고 정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1조원을 투입, 바이오기술(BT)과 나노기술(NT) 등 첨단분야 인력 1만명을 양성한다는 공약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이다. BT 관련 인력이 현재 엄밀한 의미에서 부족한 편이 아닌 만큼 대학을 통한 신규인력의 양성보다 연구현장 위주의 재교육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NT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감초'같은 기술로 명쾌하게 분류하기 힘들다는 점을 거론하며 "인기영합식의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과학기술인 사기 진작=盧당선자가 정부출연연구소의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과학기술자 연금제도를 도입하는 등 처우개선을 약속했지만 "일단 두고보자"는 눈치다.

다만 기존의 체제를 급격하게 뒤흔들지 말아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국민의 정부'가 5년 전 출연연에 대해 급격한 시스템 변화를 강요하면서 커다란 상처를 남긴 선례를 상기시켰다.

이제 연구원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경쟁이 연구활동에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 단순히 안정적인 연구환경 조성보다 점진적인 변화와 질적인 개선을 원했다.

예를 들면 산.학.연간 인력교류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최대한 살려주고, 능력있는 연구원은 정년을 넘어서도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테뉴어(종신고용)' 제도 도입 등이다.

이성우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위원장은 "일정 부분의 인건비를 조달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따야 하는 PBS(연구과제중심제도)가 출연연에서만 시행되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다"며 "현재 '옥상옥'의 비난을 받고 있는 연구회 체제 또한 좀더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공부문에 여성과학기술자 20% 채용을 목표로 한다는 공약에 대해 한국화학연구원 정명희 박사는 "20%를 여성으로 뽑으려고 해도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라며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인력양성 계획과 함께 현재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한 여성 연구인력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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