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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셰프의 ‘매콤한 비법’ 딸도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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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예수(86) 셰프가 돼지고기에 밀가루를 입히고 있다.

신당동 떡볶이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음식메뉴다.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라는 고(故) 마복림 할머니의 광고 문구는 한때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됐었다. “맛의 비결?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고추장 소스의 비결을 마음속에 간직했을 것이다. 신당동 떡볶이 할머니처럼 며느리는 물론 아들과 딸에게까지 맛의 비결을 알려주지 않는 곳이 있다. 대치동에 있는 돈가스집이다.

30년 맛집’ 시리즈 첫 회(오복 꼬리곰탕)가 신문에 게재되자 신문사로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강남 대치동에 돈가스를 튀긴지 50년 넘은 사람이 있다”는 제보였다. “주인은 90세 가까이 된 노인”이라고 덧붙였다.

신분을 감추고 노인이 운영한다는 돈가스집을 찾았다. 허름했다. 대치동 은마상가 지하 1층에 있는 5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인에게 대뜸 물었다. “맛있다던데, 비결이 뭔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한 여성이 대신 대답했다. 딸인 강인숙(62)씨였다. “아버지가 ‘비결’이란 말에 민감하세요. 오죽하면 딸인 저도 매운맛 돈가스 소스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요.” 매운맛 돈가스는 이 집에서 잘 나가는 메뉴 중 하나다. 보통 강씨가 오전 9시에 출근하면, 그의 아버지는 2시간 전인 오전 7시에 나와서 소스를 만들어 놓는단다.

소금 안 넣고 야채·과일로만 맛을 낸 소스

돈가스 소스는 과일·야채만 이용해 만들었다.

주인공은 바로 강예수(86) 셰프다. 그도 스스로를 ‘셰프’라고 부른다. 경양식을 만든 지 50년이 넘은 국내 ‘최고령 셰프’란다. 그는 “일단 돈가스부터 먹고 얘기하자”고 말했다. 취재 나간 기자에게 “먼저 먹어보라”고 제안하는 건 맛에 자신있는 음식점 사장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돼지고기에 밀가루와 계란을 묻힌 뒤 빵가루를 골고루 발라 180도가 넘는 기름에 튀겨냈다. 그 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소스를 얹으니 순식간에 돈가스가 완성됐다. 다시 한 번 “소스 만드는 모습을 보여 달라”라고 ‘요구’했다. 강 셰프는 “맛있게 먹기나 하라”며 말문을 막았다. 대신 한마디 했다. “화학조미료·색소·방부제는 안 넣어. 더 중요한 거 말해줄까? 소금도 안 써.”

돈가스 고기를 썰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평소에 먹었던 돈가스와는 다른 맛이었다. 두껍지 않은 고기 패티는 입에 넣자 부드러운 육즙이 흘러나왔고, 새콤·달콤·매콤한 소스는 고기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면서 입안에 감돌았다.

 재료를 맞춰보려고 소스만 떠먹는 기자를 본 강 셰프가 “식품영양학과 교수도 80%밖에 못 맞췄다”며 피식 웃었다. “토마토와 양파가 들어간 것 같은데요?” 그가 또다시 웃는다. “토마토, 양파는 당연히 들어가지. 마늘도 토마토만큼이나 많이 들어가. 나머지 3가지 재료는 절대 알려줄 수 없어. 손자·손녀도 모르는걸.” 아들·딸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매운맛 돈가스 소스의 비결은 나머지 3가지 재료가 뭔지 끝내 캐내지 못한 채 덮어야 했다.

 취재를 하는 동안 돈가스를 포장해 가는 학부모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의 간식으로 주기 위해서였다. ‘사교육 1번지’라고 불리는 대치동은 간식거리 하나에도 민감한 지역이다. “3년 전인가, 목에 아토피가 심해서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아이가 왔었어. ‘돈가스 먹고 문제가 생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먹기 시작하더라고.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 이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 그 후로는 부모와 아이 모두 단골이 됐어. 그 부모가 우리집 선전도 해주고 ….”

20년 단골 정육점의 최고급 등심만 사용

그가 만든 특제소스는 1999년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에서 ‘안전하다’는 인정을 받았고, 2007년 특허출원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에서 ‘음식점 하는 사람 중에 그곳을 방문한 건 처음’이라고 하면서 ‘괴짜노인’이라고 했었어.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음식으로 장난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맛의 비결은 소스뿐이 아니었다. 냉동고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20년 된 단골 정육점에서 공급받는 최고급 돼지고기 등심을 매일 들여오고 있었다. ‘고기는 한 번 냉동되면 고유의 쫄깃한 맛이 사라지고, 잡냄새가 날 수 있다’는 철학은 그의 경험이 만들어냈다.

“86년 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어. 해방과 동시에 부산으로 넘어왔지. 그런데 오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고등학교에서 딴 측량기사 자격증을 잃어버렸던 거야. 밥은 먹여줄 거란 기대로 미군부대로 갔지.” 스낵바에서 바닥닦이부터 시작했고, 몇 년 지나자 지배인이 됐다. 하지만 ‘음식점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던 그는 다시 주방 설거지부터 시작해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웠다. 고기 맛을 안 것도 그때였다. “음식 나가기 전에 조금씩 먹어보잖아. 같은 요리여도 생고기와 냉동고기는 맛이 완전히 다르더라고.”

미군부대를 나온 뒤에는 부산에서 햄버거 샌드위치 스낵바를 차렸고, 돈을 벌어 100평 넘는 경양식 집도 운영해 봤다. 하지만 인맥이 없고 운이 나빴던 탓에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생겨난 게 1980년 개업한 ‘할아버지 돈가스’다. 송파구 잠실에서 시작해 성남으로 자리를 옮겼던 강 셰프는 7년 전 대치동 은마상가에도 돈가스집을 냈다. “성남 가게는 우리 아들 거야. 여기는 딸이랑 같이 운영하고 있지.” 그는 오후가 되면 홀연히 성남점으로 가 다시 비밀리에 소스를 만들어준다. “매운맛 소스 비결을 간직하고 있는 한 주인은 나야. 내가 만든 소스가 우리 집 맛의 비결이니까.”

글=전민희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할아버지 돈가스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8시 휴무일 매주 일요일

-메뉴 돈가스 7000원, 매운돈가스 7000원, 생선가스6500원, 스파게티 5500원, 스페셜(돈가스+스파게티) 9000원

-주소 강남구 대치동 316 은마상가 지하 1층

-전화번호 02-565-2727 주차장 있음(음식점 이용 시 90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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