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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언론, ‘이혼변호사’가 되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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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원영
LA지사 기자

별거 중인 부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이혼할 거냐’ 물으면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합칠 거냐’ 하면 ‘저쪽에서 변하지 않는 한 힘들 거’라며 험담을 늘어놓는다. 상대에게 이 얘기를 전한다. 펄쩍 뛰면서 화를 낸다. “제깟 게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 난 떳떳해, 그쪽이나 잘하라고 해.” 서로에 대한 앙심은 증폭된다.

 북한 취재를 다녀온 후 남북한은 꼭 이런 별거 상태에 있는 부부관계나 다름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민족화합을 한다고 하면서, 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실상은 반세기 이상 서로 탓하고 욕하면서 상대의 변화만을 기다린 셈이니.

 만약 위의 부부가 다시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우선은 ‘증오의 확대 재생산’ 메커니즘부터 끊어야 한다. 나만 잘났다는 생각을 접어야 하고, 퍼붓던 욕도 그쳐야 한다. 상대의 변화를 확인하겠다는 것도 과욕이다. 변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보였다면 사랑의 회복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의 관계다. 결국은 같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러면 싸울 땐 보이지 않던 장점도 보이고 미워 보이던 것도 이해하게 된다.

 평양 거리를 걸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정겨운 한글 간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이 쏙쏙 귀에 꽂히는 우리말, 같은 생김새, 착착 감기는 우리 음식, 가무를 좋아하고 정이 많은 민족성…. 도착 첫날 낯선 반쪽 조국의 모습에 막연히 근육이 긴장되고 표정까지 굳어졌지만 풀어지는 덴 하룻밤이면 족했다. 그리고 분단과 대치의 현실이 떠올랐다. 아, 우리는 지금 같은 민족끼리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한민족이 극한의 대치 상태를 수십 년간 끌어오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백치 놀음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 증오의 악순환, 신뢰의 상실 외에 더 보탤 이유가 있을까.

 별거 부부가 재결합하지 못하는 데는 다른 변수도 있다. 상대의 흠집을 요것조것 드러내며 이혼을 부추기는 변호사도 있을 것이고, 상종 못할 인간이라며 차라리 깨지라고 부추기는 친구나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결합을 진정으로 원하는 스승이라면 서로의 장단점을 설득하며 한발씩 양보하고 다시 합치라고 도움을 줄 것이다.

 남북한은 그동안 어땠나. 서로를 화해시키고 재결합시켜주려는 그 무엇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나. 오히려 이혼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교설(巧說)처럼 어떤 미혹의 주문에 사로잡혀 허망한 세월을 보내온 것은 아닐까.

 독일 통일 과정에서 1등 공신은 언론이다. 지난해 한국언론재단이 펴낸 『통일과 언론: 독일의 경우』 연구서를 인용해 보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독일에서는 ‘전파적 통일’이 이루어졌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를 폭넓게 접하면서 양국민 간 정서적 통일은 급속하게 이뤄졌다. 서독은 1972년부터 동베를린에 특파원을 뒀고, 이미 그 전에 동독 기자들의 자유 취재를 허용했다. 동독인들은 체제 선전에 몰입한 동독 언론보다는 각종 정보로 ‘도움’을 주려 한 서독 언론의 진정성을 믿었다. 언론에 의한 민족 균질화가 이뤄졌고 베를린 장벽은 저절로 무너진 것이다.

 연구서는 “남북통일은 남북 사람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이해와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 실제 모습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남북 신뢰회복과 화해, 나아가 통일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통제 체제하의 북한 언론의 현실을 감안할 때 자유 대한 언론의 책임과 아량은 더욱 절실하다. 언론이 남북 간에 증오를 생산하고 확대하는 역할은 이제 그쳐야 하지 않을까. 내 쪽만 옹호하고 상대에 대한 공세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게 이혼변호사다. 자유 대한 언론이 그것을 닮는 것도 옹졸한 처사지만, 민족화합과 통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원영 LA지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