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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 메신저 대화명 변신은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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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회사원 이미경(29.여)씨의 메신저 대화명은 '내 머릿속에 대걸레'. 건망증 때문에 실수를 한 뒤 알츠하이머병을 다룬 영화 '내 머리 속에 지우개'를 패러디해 올린 것이다. 회사원 김진영(29.여)씨의 메신저 대화명은 '바람이 분다'. 라디오에서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가 흘러나오는 걸 듣고서다. 마침 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과 딱 맞았다. 김씨의 경우 마음에 드는 대화명은 1주일 정도 가지만 하루도 채 안돼 바꾸기도 한다. 메신저 인구 1000만 시대, 메신저에 익숙한 세대는 김씨처럼 매일 옷 갈아입듯 대화명을 바꾼다.

회사원 최경진(28)씨는 '아침에 팔굽혀펴기 100회' 등 주로 생활의 목표를 대화명으로 쓴다. 최씨는 얼마 전 '9월에 결혼합니다'라는 대화명을 올렸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속속 결혼해 나도 결혼해야겠다는 목표를 쓴 건데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쪽지를 보내 당황했다"고 말했다.

"잔혹동화, 최종병기 그녀, 비행기 구름 등 읽고 있는 만화책 제목이나 등장 인물을 대화명으로 자주 써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친구들이 놀라며 말을 건네더군요" (조인스 아이디 '휘리릭')

조인스 아이디 'vegabeat'인 회원은 직장 상사와 다툰 뒤 '○○○ 과장 재수 없어'라는 대화명을 썼다가 회사 동료, 거래처 직원들까지 들썩이게 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최근 메신저 대화명으로 특정인을 비난하는 내용을 쓴 한 회사원이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 100만 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는 "회사 상사에게까지 불려가는 소동을 겪은 이후 극단적인 대화명은 피한다"고 말했다. 그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가끔 못 견디게 라면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는 등 평범한 내용을 담은 긴 대화명으로 방향을 돌렸다. 또 1년 넘게 메신저 대화명을 화두로 삼아 자신의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있다.

메신저 세대들이 수시로 대화명을 바꾸는 이유는 뭘까. 김진영씨는 "예쁜 옷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입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봐주길 원해서이기도 하다. 메신저 대화명을 바꾸는 것도 외로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최경진씨가 메신저에 등록한 대화 상대는 150명. 등록한 대화 상대가 워낙 많다 보니 오히려 특별한 대화명을 쓴 상대에게만 말을 건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이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최성희(27.여)씨는 "메신저 대화명이 컨디션을 읽는 바로미터이자 공개 일기장처럼 돼 버려서 오히려 자주 바꾸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경희대 국문과 최혜실 교수는 "디지털 환경은 자유자재로 자신을 변모시키면서 놀기에 적합하다"며 "통일된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희박해지고 다중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각광받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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