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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칼럼] 발해와 러시아 에벤키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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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30면

‘우리만이 한민족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혹 잊혀진 형제 민족이 있다면…’.
최근 러시아 사하공화국을 다녀오며 떠오른 상상이다. 러시아에서 발간된 두 편의 글에 자극 받아서다. 첫째는 2005년판 소책자 ‘에벤키의 선조’, 둘째는 1968년판 소련 역사 논문집에 있는 ‘모헤족과 발해의 형성’이다.

첫째 글에는 ‘에벤키 선조인 모헤족이 정치·군사 연합체를 만들어 발해(698~926년)를 세웠다. 멸망 후 후손들은 10~11세기 추르젠이란 이름 아래 강성해져 12세기엔 거란을 격퇴했다. 추르젠은 아구드 황제 때 중국 북부 영토를 장악했다’고 나온다. 지금 50만여 명인 에벤키인은 시베리아의 복판이자 자원의 보고인 사하공화국과 크라스노야르스크주에서 험한 자연과 싸우며 살아가는 소수민족이다.

둘째 논문에선 ‘모헤족은 6세기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는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상당수 유민이 모헤족 땅으로 왔다. 모헤가 당의 공격으로 망한 뒤 모헤족 쪼쭌 장군이 모헤족과 고구려 유민을 모아 진을 세우고 황제를 선포했다’고 전한다(쪼쭌은 대조영, 진(振)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런데 ‘모헤가 고구려 유민을 끌고 발해를 세웠다’는 건 무슨 엉뚱한 말인가. 나당 연합군에 망한 고구려, 이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거란에 패해 고려에 한민족의 정통성을 넘겨준 뒤 북방에 혼을 뿌리고 사라졌다. 한국사 교과서들은 발해와 한민족이 하나임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니 에벤키가 ‘우리는 발해 건국 민족인 모헤의 후손’이라는 건 역사의 수수께끼다.

그래서 조사해봤다. 먼저 모헤에 대해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교수는 “구당서 말갈전으로 볼 때 모헤는 말갈 같다”고 말했다. 동양대 김운회 교수도 “말갈의 중국어 발음이 모흐”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고구려인·말갈·선비 같은 북방 민족의 혼성국이었고 그를 이은 발해도 마찬가지여서 ‘모헤의 발해 건국론’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셈이다. 반면 주류 사학계는 “타 민족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오솔길엔 시야를 넓혀보라고 암시하는 흔적이 많다. 지 교수는 “당시 민족 구분이 칼로 무 자르듯 되지 않았다”며 “중국 역사서도 말갈과 고구려를 통합된 유목 민족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발해사 전문가인 한규철 교수는 “말갈은 당나라 때 동북아시아 주민에 대한 범칭”이라 했고, 김운회 교수는 “한국사의 주체에서 말갈이 제외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지방민을 말갈로도 지칭한다. 말갈은 큰 전쟁 때마다 고구려의 최선봉에 선 군대로 기록돼 있다. 그런 말갈이 지배만 받았을까. 고구려·발해 역사에서 고구려·말갈의 관계를 ‘지배-복종’이 아닌 오늘날 경상도·전라도 같은 사이로 본다면 역사는 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발해의 건국 주체는 ‘고구려와 같은 말갈인, 말갈 같은 고구려인’일 수 있다. 그리고 멸망 뒤 고려로 온 유민은 한민족으로, 북방으로 퍼진 사람들은 모헤로 편입됐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한반도로 위축된 우리 역사도 확장된다. 모헤가 만주에 금(金)을 건국했기 때문이다. 한우근의 1970년 검인정 국사 교과서도 ‘말갈은 발해 멸망 뒤 여진으로 불리며 금을 세웠다’고 했다.

에벤키족이 ‘1000년 전 헤어진 고구려·발해 민족의 한 지류’라면 좋겠다. 남의 역사에 깃발을 꽂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흉내내자는 건 아니다. 러시아 거주 동포를 고려인이라 하듯 에벤키인들을 발해인 혹은 고구려인이라 할 수 있을지 북방사 연구에 박차를 가해보자는 것이다. 그게 확인되면 에벤키인들은, 고려인들이 그랬듯 한·러 관계를 업그레이드시킬 새 활력소가 될 것이다. 한 해 200억원씩 예산을 쓰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서둘러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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