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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뉴요커들이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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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규란
미국 뉴욕대 로스쿨 1학년

허리케인 샌디는 절묘한 시기에 미(美) 동부를 강타했다. 금융가는 금융 위기의 태풍을 극복하는가 싶더니 또다시 일시적으로 마비가 됐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월가는 물에 잠겼다. 미국 전력공급업체, 거대 통신사들은 그 지위가 무색해질 만큼 대자연 앞에서 나약했고, 미국 대선에서 양당 후보의 대선열기가 태풍에 한 풀 꺾이는 듯했다.

 그런데 예상한 것보다 도시는 견고했고, 불빛 한 점 없이 며칠을 보낸 뉴요커들도 특유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비록 도시의 삼분의 일은 대규모 정전으로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이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빛났다. 도시 행정 웹사이트는 블룸버그 뉴욕 시장의 능력을 질타하며 퇴임을 요구하는 항의 글로 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주민의 안전을 우려하고 경찰관과 소방관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글로 채워졌다.

 운전자들은 보행자와 서로에 대한 배려로 불 꺼진 교통신호를 대신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시위하기보다는 예년보다 쓸쓸한 핼러윈을 보내는 아이들을 위해 촛불로 집 앞을 밝혔다. 동네 가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창의적인 청년들은 자전거를 이용한 자가 발전으로 거리에 휴대전화 충전소를 마련해 고립된 뉴요커들이 친지들과 연락할 수 있게 했다.

 문명사회 시민의 모습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더 빨리, 더 많이 차지하겠다며 흥분하지 않았고 그저 한 손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며 서로를 토닥여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무질서할 수 있는 조건에서도 이들은 준법정신을 발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도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태풍 피해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은 투표소를 찾아 그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주거지를 잃어도 주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한 표, 한 표에 담아낸 것이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이들은 수준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미국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꼬집는 시선이 적지 않다. 그리고 뉴욕은 그러한 개인주의의 거점쯤 될 터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도시를 밝힌 것은 화려한 빌딩들이 아닌 뉴요커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었다. 기반시설이 마비되어도 도시의 질서가 유지되며, 물에 잠긴 증권시장이 재개되고, 태풍 피해자들의 정서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대선에서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지 않았던 선거 캠페인.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존심,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면 남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는 확신 덕분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냉혹한 도시일 것 같은 뉴욕에서 결국 사람에 대한 믿음이 뉴요커들이 사는 법이다.

김규란 미국 뉴욕대 로스쿨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