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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열여섯 점 명작 너머, 그는 화가의 삶을 일깨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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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림에 관해 배우면 그림이 주는 기쁨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조르주 쇠라(1859~1891)의 ‘물놀이, 아스니에르’.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진 엑스오북스]

그림을 본다는 것
케네스 클라크 지음, 엄미정
옮김, 엑스오북스, 335쪽
2만5000원

“사람들이 순수한 심미적 감각을 즐기는 시간은 오렌지 향기를 맡는 순간보다 짧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 관장을 지낸 미술사 전문가 케네스 클라크 (1903~83)의 말이다. 우리가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아!’하고 감탄하는 시간은 고작 2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클라크는 “위대한 미술 작품이라면 적어도 그보다 오래 주의를 집중해서 봐야 한다”고 권한다. 화가들의 생애를 기억하고, 미술사의 맥락을 이해하며 집중하며 보는 과정에서 작품을 온전히 만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클라크는 미술사 분야 거목으로 꼽힌다. 30세이던 1933년부터 46년 미술책 집필을 위해 스스로 사임하기까지 영국 내셔널 갤러리 관장을 지냈다. 『명화란 무엇인가』(1979) 등의 저작과 69년 미술을 통해 서구 문명사를 조망한 BBC 다큐멘터리 ‘문명’(Civilization)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가 들려주는 명작 열여섯 점의 이야기다.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라파엘로의 ‘고기잡이의 기적’, 쿠르베의 ‘화가의 거실’, 렘브란트의 ‘자화상’, 터너의 ‘눈보라’ 등이다.

 클라크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며 작품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숨어버린 화가를 지목한다. 노년에도 괴력에 가까운 활력을 발휘했던 티치아노와 달리 벨라스케스는 작품에서 아무것도 강조하지 않고 어떤 사실의 현장을 개성 있게 선택해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가 스스로 화가의 통찰력을 발견하게 이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색조에 관한 한 벨라스케스의 자질은 최상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본 엘 그레코는 마치 고전 극작가 같다. 표정 없는 인물들을 그린다는 얘기인데, 사실 엘 그레코가 그린 인물들은 손짓을 통해 감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라는 작품을, 손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 중 가장 감동적인 예로 꼽았다.

 쇠라의 ‘물놀이, 아스니에르’를 보며 화가의 고독했던 시간을 읽어낸 대목도 흥미롭다. 그림을 그렸을 당시 쇠라는 모네와 르느와르 등 동시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렸더라면 주눅이 들었을 때였는데, 화가는 오히려 고독과 인내를 통해 성장했단다.

 이 책은 그림, 그 이상의 이야기다. 화가의 생애와 작품 디테일, 그리고 서양 미술의 궤적이 어떤 전통 위에서 새겨졌는지를 하나하나 따진다. 그림이 품고 있는 두터운 깊이를 짚어준다.

 저자는 “나는 언어라는 낡아 빠진 도구로 그림 표면에 살짝 흠집이나 낼까 말까 한다”며 겸손해했다. 하지만 책은 미술 감상에 관한 한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영국에서 60년 출간됐고 국내에서는 80년대에 『회화감상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일어 중역본이 소개됐다가 절판됐다. 단단한 내용을 담아냈지만 부담 없는 분량에 도판을 풍부하게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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