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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권력, 10년 전 후진타오보다 강할 것”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시진핑 권력은 10년 전 후진타오(胡錦濤)보다 강하다.” 제18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18전대)가 임박했다. 18전대의 준비과정을 관찰해온 서울대 조영남 국제대학원 교수는 차기 지도부의 권력 재편을 관찰하면서 시진핑(習近平·59) 국가부주석의 권력 장악속도를 낙관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2일 최고 지도부인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7명)에 시진핑, 리커창(李克强), 장더장(張德江), 위정성(兪正聲),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 왕치산(王岐山)이 사실상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이 명단에 따르면 시진핑이 속한 태자당(太子黨·당 원로 자녀 출신)과 장쩌민(江澤民) 세력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공청단파를 압도하는 구도다. 단, 정치국(20여 명)으로 시야를 넓히면 공청단파 출신의 ‘후진타오 키즈’가 우세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진핑 1기(2012~2017년)가 ‘후진타오 없는 후진타오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공산당의 3대 핵심 요직인 당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판공청 인사를 통해 시진핑 시대의 인사 코드를 살펴본다.

중국공산당은 ‘3P’를 장악해 국가를 통치한다. ‘3P’는 인사(Personnel), 선전(Propaganda),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이다. 중앙조직부는 인사를 총괄한다. ‘후견인 컨트롤 센터’로도 불린다. 태자당의 막후 실력자 쩡칭훙(曾慶紅)이 1999년부터 3년간 조직부장을 맡은 바 있다. 후진타오 1기에는 장쩌민 계열의 허궈창(賀國强)이 조직부를 장악했다. 후는 집권 2기에야 심복인 리위안차오(李源潮)를 조직부장에 앉힐 수 있었다. 린뱌오(林彪)는 일찍이 “붓과 총은 정권을 탈취하는 무기이자, 정권을 공고히 하는 양대 무기”라고 말했다. 선전부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홍콩의 명보는 최근 자오러지(趙樂際·55) 산시(陝西)성 서기가 중앙조직부장에, 류치바오(劉奇<8446>·59) 쓰촨(四川)성 서기가 중앙선전부장에 내정됐다고 보도했다. 이는 자오러지와 류치바오가 중국 5세대 지도부의 ‘키맨’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시진핑

류치바오는 시진핑과 동갑이고 자오러지는 네 살 어리다. 둘 다 5년 후인 제19기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하다. 자오러지는 무당파이자 ‘서북벌(西北閥)’에 속한다. 간쑤(甘肅)성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후진타오와 연결되는 인물이다. 류치바오는 공청단 중앙의 2인자를 역임했다. 시진핑으로서는 선전부를 내주고 조직부를 차지한 셈이다. 그러면서 중앙판공청에 태자당에 속하는 리잔수(栗戰書·62)를 앉히는데 성공했다.

중앙판공청 주임의 별명은 ‘대내총관(對內總管·대내 업무 총책임자)’이다. 정식 명칭은 당 중앙위 판공청이다. 한국의 청와대 비서실과 역할이 비슷하다. 명목상으로는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204명(17기)의 비서기관이지만 실제론 당 총서기의 비서실 겸 경호실이다. 최고 지도부의 경호와 건강관리, 통신보안, 주요 문건의 작성·전파, 정보 수집을 총망라한다. 권력 서열 1인자의 ‘문고리 권력’인 셈이다.

그래서 중앙판공청 주임은 당 서열상 정치국원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치국원 대우를 받는 막후 실력자다. 창당 초기에는 중앙비서청으로 불렸다. 전임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야오이린(姚依林), 후치리(胡啓立), 차오스(喬石), 왕자오궈(王兆國), 원자바오(溫家寶), 쩡칭훙, 왕강(王剛), 링지화 등 모두 물밑 실세였다. 훗날 최고 지도부에 진입하는 코스로 평가된다.

리잔수는 부주임이 된 지 두 달도 안 돼 주임으로 승진했다. 2002년 가을 총서기가 된 후진타오는 장쩌민이 1999년 임명해놓은 왕강을 자기 사람으로 바꾸지 못했다. 후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은 왕강을 통해 고스란히 장쩌민에게 노출됐다. 그러나 시진핑은 다르다. 18전대 두 달 전에 자기 사람인 리잔수를 중앙판공청 주임에 앉혔다.

경험·경륜 살려 당 살림 맡은 62세 리잔수
중국의 권력교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는 15일 18기 1중전회(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선 총서기가 선출된다. 시진핑은 여기서 당권을 물려받는다. 내년 3월엔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 격)가 열린다. 시진핑이 국가주석으로 선출돼 국가수반이 되는 자리다. 가장 중요한 군권(軍權), 즉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언제 물려받을지 알 수 없다. 장쩌민은 당권을 넘긴 지 2년 뒤 후진타오에게 군권을 넘겼다. 중국의 권력교체 스케줄에 따르면 리잔수는 내년 3월 국가주석이 바뀔 때까지 후진타오와 시진핑 두 명의 ‘황제’를 모신다.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의 1746년 작 ‘두 주인을 섬기는 신하(一僕二主)’가 리메이크되는 셈이다.

리잔수는 시진핑 시대의 인사 코드를 말해주는 주요 인물이다. 62세인 그는 40대 후반에 취임한 전임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다. 중국 권부가 세대교체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중국 언론들은 62세 리잔수와 65세 궈진룽(郭金龍) 신임 베이징시 서기 인사를 ‘노성모국(老成謀國)’이라고 평가했다. 젊은 피 수혈만큼 경험·연륜도 중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거다.

리잔수는 혁명가 집안 출신이다.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허베이(河北)성 공산당원이었다. 허베이 토박이인 리잔수는 83년 허베이사범대 야간반을 늦깎이로 졸업한 뒤 당시 간부 연경화 정책에 따라 우지(無極)현 서기가 됐다. 당시 시진핑은 바로 옆 정딩(正定)현 서기로 일했다.
리잔수의 후견인은 쩡칭훙이다. 쩡칭훙의 누이동생 쩡하이성(曾海生)이 리잔수의 삼촌 리장장(栗江江)과 소학교 동창이다. 리잔수가 98년 산시성 상무위원으로 영전할 때 쩡칭훙이 큰 도움을 줬다. 2003년 리잔수는 다시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2010년에는 후진타오가 80년대 말 근무했던 구이저우 당 서기로 영전했다. 2011년 5월 시진핑이 구이저우성을 시찰했을 때 리잔수는

4박5일 동안 그를 밀착 수행했다. 이때 둘은 모종의 교감을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리잔수는 베이징 정계의 ‘뉴 커머(new comer)’다. 그런 만큼 파벌 색채가 옅다. 그게 시진핑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전해진다.

조직부 수장엔 서북 출신 무파벌 자오러지
향후 5년간 인사권을 거머쥔 자오러지 중앙조직부장 내정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8세 때 말단 통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77년 운 좋게 공농병 출신으로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고향에 돌아간 그는 줄곧 서북을 떠나지 않았다. 칭하이 상업청에서 착실히 승진을 거듭했다.

자오러지는 새 천년을 칭하이성 성장으로 맞이했다. 만 43세였다. 서부 대개발이 본격화될 무렵이다. 서부 토박이인 자오러지는 동부 연해지방의 개발 경험이 ‘참고사항’일 뿐 서부에는 서부의 방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임기 6년 만에 칭하이성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2.5배로 늘였다. 2007년엔 서북지역 문화·경제·금융의 중심지인 산시성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산시성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혁명활동을 벌인 곳이자, 시진핑이 태어나고 문혁 기간에 하방(下放) 당했던 곳이다. 그래서 시진핑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류치바오는 공청단 계열이다. 83년 8월부터 2년 남짓 공청단 안후이성위원회 서기였다. 2008년 일찌감치 정치국에 진입한 광둥(廣東)성 당 서기 왕양(汪洋)의 선임자였다. 후진타오가 당시 공청단 중앙의 제1서기였다. 류치바오는 93년부터는 1년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부편집장을 맡았다. 선전부장으로 도약할 발판을 이때 쌓았다고 한다. 그는 2001년 11월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 부서기로 지방 근무를 시작했다. 2006년 6월 자치구 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곧 광시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지역을 연결하는 ‘광시 진흥 신전략 구상’을 발표해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지역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 것이다.

선전부 장악한 胡계보 류윈산-류치바오
류치바오는 2007년 17기 당 대회가 끝나자 쓰촨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18기 정치국 진입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부임한 지 6개월 되던 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28분 원촨(汶川) 대지진이 발생했다. 초대형 자연재해가 그를 시험대에 올렸다. 류치바오는 능란하게 난국을 돌파했다. 같은 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와 내수 진작을 위해 투입된 4조 위안(약 700조원)은 그에게 구세주 역할을 했다. 쓰촨성 경제의 빠른 회복은 베이징 입성을 위한 티켓이 됐다. 류치바오의 선전부장 취임은 사상·문화·선전 업무를 맡던 리창춘(李長春)-류윈산 라인이 류윈산-류치바오 체제로 바뀜을 의미한다. 선전 분야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 계파의 분업 체제가 후진타오 단독 체제로 통일된다는 뜻이다.

조영남 교수는 “시진핑 집권 1기가 나아갈 방향은 후진타오 시기와 비슷하지만 권력 확보의 속도·강도는 상대적으로 더 빠르고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대응 자세와 관련해 “시진핑 지도부가 펼칠 민생 중시 정책이 우리 경제에 끼칠 영향에 주목하고, 중국의 외교노선 업그레이드에 신중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정치국(Politburo) 공산당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이자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 가장 권력 서열이 높은 간부들의 집합체다. 25명 미만의 정치국 위원은 중국에서 ‘당과 국가의 영도인’으로 불리며 부총리급 대우를 받는다.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선출되며 매월 회의를 열어 국가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정치국 위원 명단은 성씨의 획순으로 배열한다. 정치국 상무위원·서기처와 달리 서열이 없다.

신경진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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