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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홀로, 그리고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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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직
변호사

특히 남자로서 10대를 보낸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와 이런저런 갈등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때로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거의 ‘패륜적인’ 상황도 주위에서 가끔씩 듣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도 곧 끝나고 20대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화해’를 한다고 한다. 아버지와 갈등과 화해를 거쳐 청소년이 커 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역시 주위에 많이 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냥 질풍노도라는 말로 대변되는 청소년기의 거친 심성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순치돼 간다는 뜻 정도일까.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부정하고, 마침내 극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나 역시 유사한 경험을 겪었고 지금도 그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교장 선생님 출신의 조용한 심성을 가진 아버지, 그리고 이른바 모범생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나였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그리 없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겪은 한 사건이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때 그 사건을 겪으며 아버지는 여러 사람 중 하나인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이후 나는 서서히 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그야말로 ‘자력갱생’을 하게 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버지를 극복한다고 하여 아버지를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라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게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인간이 되는, 즉 홀로 서기의 과정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독립적인 개인이 주위의 사람들과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즉 ‘홀로’를 바탕으로 하여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홀로라는 인간이 형성돼야 할 것이며, 그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다. 이를 위해서는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의 여러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갈등과 충돌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당연시했던 주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이러한 ‘공식’에 걸맞은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지 걱정된다. 먼저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공부와 시험에 얽매여 있어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해받고 있다.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자아 정체성, 홀로 서기 등을 요구한다는 것은 기성세대로서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대학 입시에 논술 과목이 있다는 것을 면죄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홀로 서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갈등과 극복, 객관화라는 ‘형이상학적’ 요소만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물질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청년들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물적인 능력을 얻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선다는 것은 거짓된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독립적이고 원만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여건을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라고 할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별 의미 없는 입시 경쟁을 바로잡고, 그들이 적절한 직업을 가져 홀로 서기가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선 주자들이 이에 관해 구체적인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칸트의 말을 빌려 “홀로가 없는 함께는 맹목이고, 함께가 없는 홀로는 독단이다”라고 한다면 이를 위해 기성세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무기력한 한 개인으로서 ‘홀로, 그리고 함께’가 이번 선거의 주된 이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