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세 후보가 매니페스토 실천공약 못 내놓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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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민단체인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사무총장 이광재)는 2006년 지방선거 때 창설된 이래 주요 선거 때마다 실천 가능한 공약을 후보들에게 요구하고, 이를 검증함으로써 정책선거 풍토를 뿌리내리는 데 독보적인 역할을 해 왔다. 매니페스토(manifesto)에 부합하는 실천공약은 목표·우선순위·재원·방법·절차의 다섯 가지 항목에 가능한 한 수치로 표현된 답이 채워져 누구든지 쉽게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어제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에게 레드카드를 들었다. 20일 전 각 후보에게 4개 항목, 33개 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요청했는데 후보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아무도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일주일 전 구호 수준의 정책공약을 중앙선관위에 제출할 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재원과 우선순위, 절차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매니페스토 실천공약의 요건을 갖추는 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이 세 후보 모두에게 “무능하거나 비겁하다”고 경고한 건 이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 측은 정책의 내부 조율이 안 됐고, 문재인 후보 측은 업무 분담에 미스가 있었으며, 안철수 후보 측은 11월 10일 총괄 정책발표일까지 답변서를 내놓을 수 없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선거를 불과 50일 남겨놓고 한 그들의 변명은 정치게임에 휩싸여 정책 우선 정신이 실종된 2012 대선의 현주소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박 후보 캠프의 내부 조율 실패는 공약을 담당하는 김종인 행복추진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 사이의 갈등,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의 정치개혁안 표류 때부터 예견된 사태다. 문 후보 캠프는 온통 후보 단일화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데다 이른바 용광로 선대위의 옥상옥, 업무 중복 때문에 정책을 결정하는 데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다. 안 후보 측은 자기 내부 일정을 이유로 국민에게 제시해야 할 공약 서비스를 외면하고 있으니 안 후보가 입만 열면 외치는 국민이 무색할 뿐이다.

 후보들의 수준이 대선의 수준이다. 후보들은 지금이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정책파트를 최우선적으로 챙기길 바란다. 실천공약을 만드는 데 자신의 철학과 정치생명을 걸고 정치자원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