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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쿨쿨… 이래 봬도 치매 노인 실어증 고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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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호 08면

26일 일산 킨텍스에서 시바타 박사가 애완동물과 같은 심리적 안정을 주는 로봇 ‘파로’를 안고 있다. 집에도 파로가 있는지 묻자 시바타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하지만 사무실엔 여러 개 있다”고 답했다. 최정동 기자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 시바타 다카노리(柴田崇德ㆍ45) 박사가 무게 2.7㎏, 길이 50㎝의 바다표범 ‘파로’를 품에 안았다. 새하얀 털에 꼬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새끼 바다표범이다. 파로는 2002년 기네스북에 심리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등재된 최초의 로봇이다. 속눈썹이 긴 까만 눈을 끔뻑거리다 스르르 잠든다. 배터리가 없다. 시바타 박사가 젖병 모양의 충전기를 파로의 입에 꽂은 후 쓰다듬어 준다. 전기 섭취를 하면서 잠결에 작은 소리로 칭얼댄다.

심리치료 로봇 ‘파로’ 개발한 일본 AIST 시바타 다카노리 박사

26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전시관에서 시바타 박사를 만났다. 그는 로보월드 2012 국제로봇기술포럼에서 ‘아기 바다표범 로봇 파로와 치매 환자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나고야 대학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시바타 박사는 2001년부터 AIST의 지능시스템연구실 수석연구 과학자로 재직 중이다.

“개·고양이 모델은 복잡해서 퇴짜”
2002년 개발된 파로는 당시 ‘혁신적 컨셉트’의 로봇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기계공학적 연구에 집중하는 국내 연구자들에겐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전까지 로봇이라고 하면 움직임이 많은 금속성의 ‘기계’를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로봇은 어원조차 노동(체코어robota)으로, 대체로 인간을 대신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파로는 역설적으로 하는 게 없는 ‘무노동의 로봇’이다. 대신 사람에게 위안을 제공한다. 조광수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는 “사람이 무얼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인간 행동에 맞춰 로봇 개발이 진행돼야 함을 보여준 혁신적 사례”라고 소개했다.

시바타 박사에게 파로는 왜 ‘하필’ 바다표범 형상을 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개와 고양이 모양을 생각했는데 진짜 개·고양이처럼 달리고 구르고 행동하려면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디테일이 잘 알려져 있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기대치를 맞추는 게 쉽지 않죠.”

동작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호감이 가는 동물, 응접실 소파에 앉아 쓰다듬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동물을 찾다 보니 둥글둥글한 아기 바다표범이 떠올랐다. 시바타 박사는 2002년 캐나다 바다표범 서식지를 찾아 2주간 관찰을 했다. “아기 바다표범은 거의 24시간 잠들어 있는데,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엽습니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사람이 아기를 안았을 때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했어요.” 2005년 상용화된 파로는 주로 치매환자 치료와 독거노인의 고독을 달래주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전 세계에 1000대쯤 팔렸다. 일본의 경우 파로 구매자 중 60%가 개인인 반면 다른 국가에선 요양원 등 관련 시설에서 구매한다. 아직 대량생산을 못해 대당 650만원이 넘는 고가품이다.

파로처럼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봉사하는 로봇은 최근 관련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분야 중 하나다. 미·일 등 로봇 선진국에선 1980년대부터 기계가 아닌 인간 행동에 초점을 맞춘 로봇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로봇 제작전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연구해야 하고 그러려면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필수다.

실제로 파로의 컨셉트는 심리학 연구논문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로봇은 어떤 로봇일지 생각해 보았죠. 가사일을 해 줄 로봇을 만들려면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 그릇을 닦거나 빨래를 해야 하는데, 이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그러다 1993년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을 치료한다는 연구를 접했습니다. 환자들이 있는 병원이나 요양원엔 진짜 동물 반입이 어렵죠. 그래서 심리치료 로봇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파로의 기능은 단순하다면 아주 단순하다. 낮엔 꿈틀거리면서 놀고, 밤엔 잠을 잔다. 이용자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가끔 울기도 한다. 이는 두 대의 중앙처리장치(CPU)와 항균털로 감싼 몸통 밑에 촘촘히 박힌 정교한 센서 덕택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두 대의 CPU와 항균털·센서로 구성
“처음 만든 1세대 파로는 연구실에 있는 ‘고물’들을 끌어모아 조립했어요. 상용화 전에 만든 프로토 타입 중엔 커다란 세제통으로 몸통을 만든 것도 있었죠. 내구성 문제를 개선한 게 6세대, 상용화 모델인 8세대는 2004년 완성됐죠.”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개선 작업을 거쳤다. 내년엔 치료 목적에 맞춰 전문화된 파로가 만들어진다. “유럽 쪽 사회복지사들의 제안으로 질환별로 치매환자용 파로, 발달장애 아동용 파로, 자폐아동을 위한 파로로 세분화돼 나올 예정”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파로의 치매 치료 효과가 탁월하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또 효과가 어느 정도 지속되는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환자들의 변화는 꾸준히 관찰된다. 시바타 박사는 최근 사례를 소개했다. 덴마크의 한 요양원에 있던 여성 치매환자가 말(言)을 잃었다고 한다. 원래 덴마크어와 폴란드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치매 발병 후 덴마크어를 완전히 잊은 것이다. 하지만 파로와 교감하면서 덴마크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정한 부분을 자극해 환자 뇌 속의 ‘덴마크어 사전’과 말하는 기능을 잇는 고리가 다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로봇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는 “누가 파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파로의 역할은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겐 인형, 누군가에겐 애완동물, 누군가에겐 친구입니다. 파로를 개발했지만 파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용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죠.”

그렇다면 시바타 박사에게 파로는 무엇일까. “내게 파로는 하나의 매체(medium)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의도(삶의 질 향상)가 파로를 통해 전달되길 바랍니다.”

파로와 같은 로봇을 시작으로 언젠가는 친구나 가족을 대신할 로봇도 나올까. 시바타 박사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이미 대체 현상을 볼 수 있죠.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람인 척 메일을 보내주기도 하잖아요. 그러면서 돈을 요구하고….”

그는 “기술 발전엔 끝이 없고, 그게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기술 연구자로서 윤리적 이슈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일본과 한국 과학자들은 유럽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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