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노벨수상자의 찢어진 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Gurdon Institute(거든 연구소).’ 3층 건물 현관 위에 큰 간판이 달려 있었다. 수백 년 된 교사(校舍)와 집이 수두룩한 케임브리지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빌딩이었다. 안내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병원 냄새가 풍기는 실험실을 지나자 구석 쪽에 방이 하나 보였다. 올해의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된 존 거든 영국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의 연구실.

 안내원이 문을 열자 백발이 성성한 여든의 노교수가 현미경으로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렸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후라 오라는 곳도, 찾아오는 이도 많을 게 분명했지만 연구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방 크기에 놀랐다. 자신의 업적을 기념해 대학에서 만들어준 연구소인데 소장실은 고작 폭 3.5m, 길이 4m 정도였다. 책상 맞은편에 실험장비가 놓여 있어 소파나 탁자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함께 간 JTBC 영상취재 기자는 삼각대를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촬영에 애를 먹었다. 방 안에 있는 의자는 딱 3개. 모두 팔걸이 없는 작은 크기의 허름한 것이었다. 그중 현미경 앞의 것은 낡아서 가운데가 찢겨 있었다.

 대화 중간에 흠칫 놀라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는 이틀 전 아침 8시30분쯤에 연구실에서 노벨위원회로부터 수상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평소 그 시간이면 이미 출근해 있다는 것 아닌가. 10년 전에 서울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공항·호텔·학회장 말고는 가 본 곳이 없어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그는 이 만남 이후인 17일 학회 참석차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거든 교수는 6억5000만원의 노벨상 상금을 학생들 장학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 연구실에서 나오는 길에 보니 실험실에 컴퓨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주인공 모습에 얼굴만 거든 교수로 합성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장이 에너지가 넘쳐 학생들에게 쉴 틈을 안 주고 연구에 몰아붙인다는 것을 풍자해 한 제자가 그려 붙여 놓은 것”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세계적 석학이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두 해 전 독일에선 200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타 뮐러(59)를 만났다. 그는 “영혼이 지칠까 봐” 되도록 행사 참석이나 인터뷰를 피한다고 했다. 대화를 나눈 곳이 베를린 복판의 카페였는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용히 글만 쓰고 싶은 게 소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와 친분 있는 인사를 통해 인터뷰에 응하도록 설득한 게 미안해졌다.

 노벨상 계절만 되면 한국은 국민적 박탈감에 휩싸인다. 영국 116명, 독일 102명 같은 통계까지 등장해 빈곤감을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수치가 아니라, 거든 교수나 뮐러처럼 한눈팔지 않는 지식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