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잡지 마라 … 튀지 마라 … 젖어 들어라 …거대한 산, 레미제라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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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우의 한계는 과연 어디인가.

뮤지컬 배우 정성화(37). 그가 다음 달 3일부터 국내 초연 무대를 갖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 역을 맡았다. 또 한번의 도약 기회다.

지난 8년, 거침없는 질주였다. 2004년 ‘아이 러브 유’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개그맨의 한 차례 외유”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아니었다. 탁월한 순발력에, 중저음의 안정된 가창력이 뒤늦게 발견되고, 여기에 흡인력 있는 연기까지 가미되면서 조금씩 빛을 보았다. ‘맨 오브 라만차’로 조승우와 맞짱을 뜨더니 마침내 2009년 ‘영웅’의 안중근 역으로 그는 만개했다. 이듬해 각종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정성화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정점을 찍고 서서히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또 아니었다.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와 뮤지컬 ‘라카지’로 여장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더니, 이번엔 파란만장한 역경을 헤쳐온 장발장으로 변신한다. “뻔하면 재미없잖아요. 개그맨 정성화가 안중근을? 그랬던 정성화가 게이를? 그 게이가 다시 장발장을? 팬들의 의표를 찔러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배우의 의무 아닐까 싶어요.”

국내 뮤지컬 배우 중 최고의 가창력으로 꼽히는 그에게도 ‘레미제라블’ 오디션 과정은 꽤 버거웠던 모양이다. “전부 다섯번이나 시험을 봤어요. 근데 딴 오디션이랑 달라요. 노래 부르고 나서 ‘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가라는 게 아니라 ‘음, 잘하셨는데 이렇게 한번 불러보죠’라고 자꾸 주문을 하는 거예요. 그 주문에 맞춰 하려다 보니 오디션을 하면서 실력이 느는 거 있죠. 아마 떨어졌어도 원망 안 했을 거 같아요.”

그는 노력파다. 지난 3월 영국 런던에 건너가 한 달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다. 지금도 레슨을 받고 있다. “제가 A까진 편안히 올라가요. B플랫도 힘을 쓰면 가능하죠. 근데 ‘레미제라블’에선 B가 대부분이에요. 머리가 쭈뼛하죠. 게다가 하이톤으로 정확하게 콕콕 찍어 불러야 되는 부분도 많고…. 우쭐하려는 순간마다 이런 괴물이 제 앞에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에게 ‘레미제라블’은 거대한 산이었다. “20년 전 서울예대 당시 해적판으로 올라갔던 ‘레미제라블’을 봤어요. 뭔가 털썩 주저앉게 하는 느낌이랄까….” 막상 연습해 보니 어땠을까. “머리가 복잡하면 대본을 가만히 들여다봐요. 저절로 답이 나오니 참 신기하죠. 마치 대본에서 ‘폼 잡지 마라’ ‘튀지 마라’ ‘젖어 들어라’고 가르치는 것 같아요. 앙상블 한 명까지 버릴 장면 하나 없는 완벽한 밸런스, ‘레미제라블’의 저력입니다.”

그는 어떤 뮤지컬 배우를 꿈꿀까. 뜸을 들이더니 “콤 윌킨슨처럼 ‘레미제라블’을 10년간 하는 배우도 멋있지 않을까요”란다. “전 노래 한 곡에 ‘여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막연히 처음부터 잘 부르는 게 아니라 한 소절 한 대목을 부르며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그 변화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거죠. 저 역시 멈춤 없이 언제나 진화하는 뮤지컬 여정을 떠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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