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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이 얇아져서? PPL 약발 떨어져서? 이참에 마이웨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뭐가 유행인지 궁금할 땐 돌아가더라도 지하철을 오래 탄다. 승객들의 옷차림에서 뭔가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도 그렇게 유행을 감지했다.

저지 소재의 일자 스커트(그것도 꼭 검은색)에 러닝톱을 입는 믹스매치 스타일, 상의가 하의를 덮어내리는 하의 실종 패션, 자잘한 꽃무늬 원피스에 빈티지 점퍼를 입는 차림새가 자주 눈에 띄자 트렌드를 확신했다. 열 명 중 셋이 입었다면 틀림없었다.

물론 서울 홍대 앞이나 가로수 길에 나가면 더 트렌디한 모습이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패션 선도자’들이 아무리 남다르게 입는다 한들 보통 사람들이 따라 하지 않는다면 유행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한데 올가을,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 옷차림에 딱히 새로운 게 없다. 브랜드들이 일찌감치 점찍은 트렌드와 무관하다. 가령 A브랜드는 ‘백팩 패션’이 뜨겁게 달아오른다고 주장했고, B브랜드는 매니시룩을 보여주는 와이드 팬츠의 부활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입증하는 거리 패션을 아직 보지 못했다. 재작년부터 너도나도 사입던 야상 점퍼도 그대로이고, 둔탁해 보이는 워커 부츠도 다시 나왔다. 치마와 붙은 레깅스에 운동화를 신는 차림 역시 낯설지 않다. 혹시나 싶어 잘나가는 쇼핑몰을 클릭해 봐도 ‘강력 추천’ ‘인기 상품’ 리스트가 그저 그렇다.

뭐, 그럼 옷은 그렇다 치자.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는 핸드백 역시 변화가 없다. 롱스트립이 달린 사각백의 스타일이 지난해에 이어 여전히 대세다. 변화가 거리를 휩쓰는 ‘잇백’ 역시 실종이다.

이유는 어디에 물어도 비슷하다. 경기가 안 좋아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것. 살림이 빠듯할 때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옷과 화장품이란 얘기다. 실제 패션 뷰티 브랜드 담당자들 역시 “성장은커녕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는 푸념을 한다.

패션계 한쪽에서는 지금껏 유행을 주도해 온 ‘연예인 PPL’의 약효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연예인이 들고 나오는 물건이 협찬이라는 걸 이제 누구나 알게 되면서 그만큼 파급력도 떨어지게 된다는 것. 사극이 많아지면서 노출 빈도가 자연스럽게 줄기도 했다.

연유가 어찌됐든 ‘유행 실종’, 솔직히 반갑다. 교복처럼 너도나도 걸치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유행의 과속이 못마땅했었다. 사실 우리가 아는 ‘패션’은 마케팅 관점에서는 유행 주기 중 하나다. 즉 1~2년간 지속적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은 스타일이란 뜻.

반면에 한 시즌 내에서도 반짝하고 사라지는 유행은 패드(fad)다. 그리고 아예 몇 십년간 스타일이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아이템, 가령 샤넬의 트위드 재킷, 폴로의 피케셔츠 등은 ‘클래식’으로 분류한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우리는 패션이 아닌 패드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 점점 옷을 사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건 정말 ‘내 스타일이야’라거나 ‘너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인 물건들이지만 언제 유행이 바뀔지 모르니 큰 맘 먹고 제대로 된 옷을 사기가 망설여진다. 그 대안으로 바느질은 좀 부실해도 패스트 패션을 찾고, 가끔은 유사 디자인에 혹하기도 한다. 내 경우엔 2년 전 샀던 치렁치렁 롱스커트가 꼭 그랬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진다. 다시금 패션 브랜드들은 너나없이 겨울 트렌드를 예견한다. 이번엔 오버 사이즈 코트나 패턴이 강한 니트란다. 하지만 1~2년 전 유행 아이템들이 그냥 이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새 옷에 눈독 들일 필요 없이 지겹게 입으면서 나만의 스타일링을 찾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포화 상태인 옷장에 숨 돌릴 여유도 주고 말이다. 자연스레 카드 값까지 줄어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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