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찬일의 음식잡설] 통영 다찌집, 마산 통술집… 술꾼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지금도 ‘마지막 주막’을 찾아다니는 호사가가 있다. 누룩향 진한 술청에서 전통의 안주에 대포 한 잔 걸치고 싶은 거다. 비라도 내려 술청에 덧댄 양철지붕을 때리면 그 운치가 여간만 하겠는가 싶다. 빗소리 장단에 마음은 풀어지고, 주모가 진안주라도 내오면 술꾼들의 작은 천국일 것이다.

나도 그런 소박한 기행에 나설 때가 있다. 특히 남도로 발길을 돌린다. 김치쪽 말고는 모두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 서울의 고약한 인심을 털어내자면 그쪽이 대안이다. 지리산 자락 구례에 갔더니 시내에 낡은 대폿집이 있었다. 근처에 키가 훌쩍한 새 건물들이 들어섰건만 홀로 낮은 키로 졸듯이 서 있는 집이었다. 연세 드신 ‘아짐’이 술이며, 안주며 서빙을 도맡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막걸리를 마셨고, 아짐은 손에 잡히는 대로 따로 안줏값도 없이 먹을 걸 냈다. 우리 같은 나그네에게도 푸짐한 생두부는 시쳇말로 ‘서비스’였다. 국물 한 그릇, 부침 한 점까지 야박하게 챙겨 받는 일본식 선술집이 우리 술문화에 들어온 이후 이런 후한 대접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남쪽 바닷가에도 우리 식 술집의 원형이 살아 있다. 통영에는 속칭 ‘다찌집’에서 푸짐한 한 상을 받을 수 있다. 철마다 통영 앞바다는 안주 만들기 좋은 해산물과 생선이 집을 짓고 드나든다. 그걸 잡아서 상을 차리면 요즘 말로 웰빙의 최전선인 셈이다. 한 병 두 병 술을 시키는 대로 주모의 안주가 더 화려해지는데, 귀한 비장의 안주를 먹기 위해서는 술병 마개를 좋이 비틀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인심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술병을 딴다.

남쪽에는 ‘다찌집’의 통영과 쌍벽을 이루는 도시가 있다. 남도의 동쪽, 항아리처럼 깊숙한 만(灣)을 마당처럼 거느리고 있는 마산이다. 잘 먹기로는 어느 동네 부럽지 않게 윤기가 자르르한 곳인데, 전국적으로는 아귀찜으로 유명하지만 통술집이라는 명물 술집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 현장인 오동동의 처연한 골목 사이로 ‘오이소!’ 소리가 들린다. 통술집이라.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절묘한 민중의 작명이다. 70년대부터 선원들의 전용 술청 골목이었다는 이 거리는 이제 퇴색한 느낌이다. 젊은 손님은 세련된 호프집이나 주점으로 몰려가는지 오십 바라보는 내 나이가 막내급이었다. 술이 추가되면 새로운 상이 깔리는 통영과 달리 이곳은 술이야 마시든 말든 한 상에 값이 정해져 있다. 상다리가 휘도록 다채로운 안주가 나오는데, 그 상을 바라보던 친구가 한마디 얹었다. “제철 생선 공부가 속성으로 다 되는구나!”

술맛 돋우는 자진모리에 트로트 젓가락 장단은 사라졌지만 오동동의 술집은 여전히 환하게 불을 켠다. 이 시대 최후의 주모들이 바지런하게 탕을 끓이고 안주를 만든다. 마음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무거워지는 건 내가 나그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