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티베트 유물에 내준 집 … 휑한 거실엔 언제라도 떠날 듯 짐 몇 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8면

1 신영수씨가 티베트 승려들의 의식용 모자를 설명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모자를 화려하게 장식해서 쓰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만사람에겐 만가지 사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대개 고만고만하게 산다. 자기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자면 일정분량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버거운 저항을 견뎌내야 할 수도 있다. 그게 힘에 부쳐 우린 대개 ‘일반적’으로 사는 ‘일반인’이 된다.

농사짓는 곳에서는 농경민이 일반인이고 목축하는 곳에서는 유목민이 일반인이다. 농경민은 정착하고 유목민은 떠돈다. 농경민은 쌓고 유목민은 흩는다. 그래서 농경은 무겁고 유목은 가벼운가. 하긴 짐의 무게와 삶의 무게가 정비례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 현대 도시인은 농사를 짓지도 가축을 기르지도 않으니 삶의 방식을 농경과 유목으로 양분할 순 없다. 하지만 그래서 머무는 자와 떠도는 자가 더 뚜렷이 구분되기도 한다.

티베트박물관 신영수(58) 관장은 떠도는 자다. 일 년의 절반은 집 밖을 ‘유목’한다. 찾아가는 곳 또한 유목민의 땅이다. 티베트와 몽골을 남들 아무도 안 다닐 때부터 찾아다녔다. 미국도 가보고 유럽도 가봤지만 심드렁할 뿐 별 재미가 없었다. 중앙아시아 고원이나 사막에 이르자 그 심드렁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무조건 찾아갔다. 유목민의 파오에서 먹고 잤고 밤이면 무섭게 빛나는 별들을 봤다.

2층은 티베트 유물 전시공간이다. 벽면에 드러난 인왕산 바윗돌과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돌기둥이 보인다.

난 사실 진작부터 신영수 관장에게 관심이 있었다. 서울 사는 유목민의 거처를 구경하고 싶었다. 서울 삼청동 어느 골목 안에 ‘티베트박물관’이란 간판이 걸리고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인골로 만든 피리와 소년의 두개골로 된 북을 봤을 때부터, 그 곁에 놓인 손으로 수놓은 찬란한 비단 겉옷들과 사람얼굴과 똑같은 등신대의 티베트 불상들을 봤을 때부터, 수십 톤은 돼 보이는 무쇠로 만든 거대한 소와 역시 수백 톤은 됨직한 돌기둥들을 어루만질 때부터, 도대체 이런 것들을 수집하고 여기까지 날라온 사람은 누구일지 호기심을 가누기 어려웠었다.

드디어 나는 신 관장의 집 방문을 활짝 열고 그가 즐겨 앉는 테이블에 앉았다. 앉아서 그의 의식주의 현장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는 지금 삼청동을 떠나 인왕산 아래 누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수천 년의 거리를 마구 누비고 다녀서인지 신 관장은 나이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데 말은 대체로 어눌하다. 내가 고심해서 던진 몇 가지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싱겁기 짝이 없다. “방랑의 피가 흐르는 건가요? 어째서 티베트를 그렇게 자주 가지요?” “병이지요 뭐. 벽(癖)일 수도 있고!” “수집한 유물마다 사연이 있겠군요. 대략 몇 점쯤 되나요?” “아무도 관심이 없을 때니까 내게 왔지요. 몇 점인지는 잘 몰라요.” “티베트는 몇 차례나 가셨나요?” “세어볼 수 있나요, 어디. 한 해에만 열 번 넘게 간 적도 많은 걸!” 퉁명스러운 건 아니고 수줍은 쪽이랄까. 나서서 자신을 광고하거나 자랑하는 데 퍽 서툴러 보인다. 동행한 유나방송 김재진(58) 대표가 “체질이죠!” “10만 점쯤 될 겁니다” “한 100번?”이라고 대신 답해 준다. “국립박물관에서 차마고도 특별전을 할 때도 90%는 신 관장이 내놓은 물건들이었어요. 국립박물관 중앙아시아관에는 ‘신영수’ 이름을 딴 방이 따로 있지요” 역시 김 대표의 귀띔이다.

신 관장의 집은 생활공간과 전시공간이 붙어 있다. 1, 2층은 전시실이고 3층은 살림집으로 나눠두긴 했지만 살림집 내부 역시 전시장의 일부다. 살림살이는 거의 없다. 침실엔 덜렁 침대 하나. 거실엔 덜렁 소파 하나! 거실 구석엔 짐들이 무더기로 꾸려져 있다. “저게 바로 유목민의 표상 아닙니까. 언제든 맘만 먹으면 떠날 수 있게 준비 끝!이거든요.”

3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진 기원전 8세기경의 유리 장신구들.

누상동은 일제시대 군수공장이 있었고 신 관장의 집은 당시 군수공장 노동자 숙소로 쓰이던 곳이다. 원래 벽을 쌓았던 붉은 벽돌이 드러나도록 바깥에 바른 시멘트를 걷어냈다. 내부 벽면은 인왕산의 암반이 그대로 보이는데 이 역시 바깥에 덧댄 콘크리트를 걷어내자 암벽이 등장하더라 한다. 기둥이 부실해 인도 북부에서 실어온 조각한 돌기둥을 보강했고 천장도 새로 덧댔다. 여러 집을 다녀봤지만 일제시대 지어진 집은 첨이다. 오래되어 되려 격조와 향기를 얻었다. 수천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 생산된, 수천 년 혹은 수백 년 묵은, 온갖 이야기를 간직한 물건들, 그것들이 어울러진 호흡과 충돌이 티베트박물관을 이루는 아우라다.

사실 지금 티베트박물관은 공식적으론 문을 닫은 상태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유물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2010년에 삼청동 박물관을 문 닫으면서 신 관장은 개인 박물관 운영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다. “다가구 주택을 박물관으로 무단 용도변경했다고 종로구청으로부터 2000만원 벌금을 맞았어요. 박물관진흥법이 만들어져 허가가 난 사항이었는데! 관람객 때문에 시끄럽다고 이웃에서 민원을 넣었던가 봐요.” 씁쓸하고 지쳐서 그만 문을 닫기로 했다. 많은 양의 유물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개인의 힘으론 버거웠다. 비단과 모피 같은 섬유들은 습도·빛·온도를 적절히 조절해 줘야 장기보존이 가능한데 관리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기껏 모아놓고도 버린 것이 부지기수다.

신 관장이 걸고 있는 목걸이와 팔찌는 기원전 4500년께의 ‘천주(天珠·다양한 수의 눈(眼)이 있는 유리 같은 보석)’로 만든 것이다. 예사 아닌 에너지가 방사된다고 내가 신기해하자 그는 비로소 신이 나서 숨겨둔 유리구슬들을 조심스레 꺼내온다. “이게 신라입면유리의 비밀이라는 역사스페셜에 나온 바로 그 유리예요. 미추왕릉에서 발견됐던 바로 그거! 보세요. 여기 메두사의 눈이 새겨져 있죠?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코아유리예요. 자바섬에서도 단 한 점 발견됐다던 바로 그것!” 유물 자체를 말할 때 그의 얼굴은 비로소 빛이 난다.

4 집 1층은 전시공간 겸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꾸몄다. 벽면에 보이는 것이 일제시대 때 쌓은 낡은 벽돌이다.

“이건 히말라야 샤먼이 쓰던 장신구와 의상들이에요. 얼마나 화려해요?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은 공산화되면서 무속신앙을 말살했거든요. 3000미터 고산지역에는 1990년 초반까지는 그런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요. 셰르파에게 부탁해서 샤먼 의상을 1000여 점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 손으로 짜고 천연염색하고 수놓은 실크들이지요. 요즘은 현지인들도 그런 게 있었다는 것도 몰라요. 다들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야구모자 쓰고 살고 있으니까!”

고등학생 때부터 그는 탱화나 무속자료에 관심이 있었다. 고물상을 따라다니면서 무속화를 줍거나 얻기도 했다. 70년대, 귀신 나온다고 다들 갖다버릴 때 그는 탱화와 산신도와 와당을 모았다. 나중 그게 돈이 되어 한두 점 팔아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삼청동에 티베트박물관을 문 연 건 2001년, 요즘과 달리 당시만 해도 삼청동 골목은 한산했다. 당연히 땅값도 쌌다. 일본에 사설박물관만 수만 개란 얘기를 듣고 일본의 박물관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귀중한 유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모아진 시점이었다. “삼청동을 박물관 집성촌으로 만드는 게 내 꿈이었어요. 티베트박물관을 열고 실크로드 박물관, 성문화 박물관도 운영했지요. 그때까지 수집한 것들을 분류전시한 거지요.”

5 집 입구. 일제시대 군수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개조했다. 6 티베트 사람들의 나들이옷. 양털을 천연 염색해 손으로 짠 귀한 옷들이다. 7 3층 거실 구석에 부려놓은 짐들. 언제든 필요하면 지고 떠날 수 있게 준비 완료된 상태다. 8 3층 침실.

그는 오늘의 삼청동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물관은 아쉽게 접었지만 우습게도 삼청동 땅값이 턱없이 올랐으니 재미를 아주 못 본 건 아니다. 이제 누상동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치가 잠재한 지역을 찾아내는 눈이 탁월한 그가 낙점한 지역이니 누상동의 미래도 지켜볼 만하다. 요즘은 집 근처에 국숫집을 열었다. 유목민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국물에 토마토를 으깨 넣거나 된장을 푼 국수는 맛이 썩 괜찮은데 더 볼 만한 건 인테리어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자료들을 한때 열심히 수집한 적이 있는데 마오쩌둥 초상과 붉은 완장들을 열렬하게 늘어놨다. “불과 얼만 전 일인데 중국에도 저 자료들을 나만큼 가진 사람이 없대요. 중국인들이 되레 신기해하죠.” 컬렉션의 힘이란 이런 건가 보다.

요즘도 그는 틈만 나면 훌쩍 떠난다. “몽골고원은 우리 고향이기도 해요. 고조선·고구려·발해땅이 다 거기였잖아요? 가면 아주 편안해요”

이 유목민은 가족이 없냐고? 당연히 있다! 27세 아들과 17세 딸이 수천 년 유물들 속에서 힘차게 자랐고 커가는 중이다. 그들 몸속을 도는 유목의 피가 우리 옛 역사를 싱그럽게 이어줄 날도 언젠가는 오고야 말 것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