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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 기록은 사유물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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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답답하다.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 내용을 둘러싸고 뒤늦게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느니 마느니 하는 내용이다. 진실은 제쳐 놓고 대화록이 있다 없다, 대화록에 그런 내용이 있다 없다 하는 입씨름만 하고 있다.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그어 놓은 경계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5년이나 지나 불거지고, 이런 저급한 논란만 벌이고 있는지 한심하다.

 NLL은 벌써 두 차례나 해전이 벌어졌고, 포항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피격 당한 수역이다. 민간인이 사는 마을이 포격 당한 연평도를 보호하는 바다다. 이런 비극을 막는 방법에 대해 정치세력마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남북 정상이 논의했는지, 했다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동네 구멍가게만 가도 인수인계는 기본이다. 옆집 할머니가 사과를 사러 왔다. 한 봉지를 사 가는데 벌레 먹은 게 2개다. 주인 아저씨는 새 사과를 들여오면 2개를 더 주겠다고 약속하고 팔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할머니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과 두 알을 더 달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하물며 국정은 말할 것도 없다. 정권은 5년마다 바뀌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계속된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세금을 잘못 부과해 더 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모르는 일이라며 묵살한다고 생각해 보라.

 외교적 합의는 정부가 바뀌어도 당연히 승계된다. 설령 정식 합의가 아니라 해도 다음 협상을 위해 차기 정부에 넘겨줄 정보는 수없이 많다. 그런 내용들을 한 정권이 끝났다고 모두 보따리에 싸 금고 속에 집어넣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다. 그러기에 ‘초당(超黨) 외교’가 강조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평양에 갔을까. 만약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에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회담록을 모두 ‘비밀 대통령 기록물’이라며 금고에 넣어 봉인하고, 30년 뒤에 열어보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 대통령은 동문서답하다 김정은의 조롱을 받고 돌아오지 않을까.

 대통령 기록물은 자료를 철저히 남기고, 왜곡·훼손·파기를 막기 위한 조치다. 차기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기본 원칙은 ‘철저한 수집·관리’와 ‘충분한 공개·활용’(대통령기록물관리법 7조)이다. 대통령 기록물은 정부 자산이다. 재직 당시 대통령의 사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관은 보관이고, 그와 별도로 차기 정부에 충분히 넘겨줘야 옳다. 그중에 비밀이 있다면 차기 정부가 비밀문서로 관리하면 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이명박 당선자 측과 인수인계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마저 한쪽은 충분히 줬다, 다른 쪽은 안 줬다고 말싸움만 한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판단을 미뤄두자. 그렇지만 국정의 인수인계는 서류 몇 장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문서에 담지 못한 미묘한 부분까지 전달돼야 국정이 바로 굴러가고, 협상에서 손해보지 않는다. 야당이 집권했다고 국정이 실패하길 바란다면 지도자라 할 수 없다. 정적(政敵)이라고 감추고 숨기면, 손해 보는 건 국익이고, 국민이다.

 대통령 기록물이 모두 봉인돼 있지 않은 것도 희한한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기록은 국가기록원 인터넷에 모두 공개돼 있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문서도 39건이 공개돼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 것은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해외 정상회담 관련 기록이 모두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묶여 있다. 목록조차 가려져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최소 10년, 길게는 30년까지 열 수 없도록 봉인해 놨다. 봉인기간은 대통령이 정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기록물이며, 무엇을 감추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영토’에 관한 문제는 대통령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국가주권 제약에 관한 조약 등은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헌법에 규정돼 있다. 물론 대화록이 정식 합의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주요한 사안이라면 사후는 물론 사전에도 국회에 설명해 줬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외통위나 정보위에 비공개로 할 수도 있고, 여야 대표만 불러 설명해 줄 수도 있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들이 자신과 관련한 기록은 모조리 창고에 집어넣고 30년짜리 봉인을 붙여버린다면 국정의 연속성은 누가 보장하나. 국정이 5년마다 끊어지는 나라가 되어선 안 된다.